출산과 우리, '태어난다는 일'

2008/03/06 06:21  로키 TAG ,
The Business of Being Born

영화 포스터

어제는 '태어난다는 일' (The Business of Being Born)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넷플릭스에서 봤다. 제목 그대로 출산을 소재로 한 영화인데, 특히 미국 산부인과에서 정상적인 출산에 하는 의학적 개입을 비판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도 해당이 많지 않나 싶다.

난 사실 여자답다는 소리는 별로 못 듣고 산다. 영화를 볼 때도 연인의 슬픈 이야기에 눈물 흘리거나 감동받는 일은 거의 없다. '저것들, 저러다가 또 몇 개월 지나면 멀쩡할 텐데.' (심드렁~) 그런 내가 정말 감동먹는 건 주로 부모와 자식 이야기다. 영화나 책을 보다 부모의 애틋한 마음이 전해질 때면 눈물이 왈칵 쏟아지곤 하고.

어제는 저 다큐멘터리 보면서 눈물을 서너 번 펑펑 쏟았다. 아이를 자연분만하는 모습이 나올 때였는데, 엄마가 죽도록 힘든 진통을 거쳐 마침내 꼬물꼬물 아기가 태어나는 순간 얼마나 감정이 복받치는지. 아씨, 생각하니까 또 눈물 나네. 애를 낳아본 일도 없는데 여자라서 그런 것일까, 인간이라서 그런 것일까, 엄마 생각이 나서 그런 걸까. 진부한 말이지만 생명 탄생의 감동은 당사자가 아닌 관객인 나에게도 참 형언하기 어려웠다.

반면 산부인과에서 아이를 낳는 모습에는 감동이 아니라 공포가 먼저 느껴지더라. 경막외 마취를 하느라 산모 척추에 주사를 놓는 모습이라든지 (으앙 으앙 으앙 으앙 으앙), 누워서 억지로 크게 벌린 다리 사이로 의사와 간호사들이 의료도구를 들고 우르르 몰려있는 모습이나, 제왕절개... 으악, 제왕절개!!! 우욱. 그게 다 연출의 힘인지는 몰라도, 봐서 끔찍하게 느껴지는 건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자연분만을 하는 모습에서 느낀 것이 고통을 이겨내는 강한 의지, 그리고 스스로 출산하는 여성의 힘이었다면 산부인과에서 아이를 낳는 모습에서 느낀 것은 철저하게 의사의 지시만을 따르는, 결정권을 빼앗긴 채 수동적이고 거의 기계적인 산모의 모습이었다. 기억에 남는 말 하나: "현대 의학은 여자에게 당신은 아이를 낳을 줄 모른다고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The Business of Being Born
물론 병원에서 아이를 낳는다고 출산의 가치가 덜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영화에서도 집에서 자연분만을 하려다가 아이가 거꾸로 되어 있어서 급히 병원에 가 제왕절개를 받는 이야기가 나오는 등, 옛날이라면 목숨을 잃었을 산모와 아이를 구해낸 현대 의학의 공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건 출산은 병이 아니라는 거다. 비정상적이거나 위험한 출산 상황에서 확실히 의학적 개입은 빛을 발하지만, 어째서 정상적인 출산에까지 개입을 해야 하는가? 기본적으로 병리와 위험을 예정하는 의학의 개입이 정상적 출산까지 위기상황으로 몰아가며, 산모와 아이에게 악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을 영화는 꽤 효과적으로 펼치고 있다.

영화를 보면서 내가 분노했던 부분. 진통이 일정 시간 이상 길어지면 병원에서는 산모에게 피토신이라는 인공 옥시토신을 투입한다. 왜? 진통이 너무 길어지면 제때 침대를 비울 수가 없어지거든. 기본적으로 사업인 병원에서는 스케쥴 조절을 위해 진통의 길이마저 맞추는 것이다. 피토신은 강하고 긴 자궁 수축을 유도하므로 이게 심해지면 또 늦추려고 경막외 마취를 한다. (척추에 주사 싫어 우아앙) 그러면 이번엔 또 너무 수축이 늦어져서 피토신, 이번엔 빠르니까 마취...

그러다가 결국 자궁 속에서 이리 눌리고 저리 눌린 아기가 위험해지면 제왕절개를 하고 아, 이 위대한 현대 의학이여 하며 자축한다는 거지. 애당초 개입하지 않았으면 대부분 자연분만으로 끝났을 정상적인 분만을 굳이 위기로 몰아가고서 말야. 게다가 제왕절개는 돈도 더 되고 빨리 끝나는데 의사 입장에서는 안할 이유가 어딨나. 그리고 아이를 구하려고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는 방어가 되는 법적 이유까지 있다. 그런데 그 속에 정작 산모와 아이의 복지가 끼어들 틈은 어디 있지?

게다가 흔히 아이를 낳는 자세 하면 등을 대고 누워서 다리를 위로 벌리는 걸 생각하는데, 사실 이 자세는 출산 자세 중에서도 최악이라고 한다. 등을 대고 누우면 아기가 나와야 하는 골반은 오히려 좁아지고, 또 골반의 움직임이 있어야 아기도 쉽게 나오는데 움직임을 제약하니까. 사실 이 자세의 진짜 편의는 산모나 아이가 아니라 의사에게 있다. 훨씬 편하고 자연스러운 자세인 쪼그려 앉는 자세하고 비교하면 쉽게 알 수 있지.

정상 분만을 도와줄 사람이 의사가 아니라면 그 대안은 무엇일까? 바로 어느새 사극에나 나올 것 같은 말이 되어버린 산파라고 영화에서는 주장하고 있다. 유럽과 일본에서는 대다수의 출산을 산파가 돕고, 네덜란드는 출산의 1/3을 집에서 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영아사망률은 95%의 출산을 병원에서 하는 미국보다 훨씬 낮다. (미국의 영아사망률은 산업국가 중 최악 수준이라고 한다. 우리는 어떨까 모르겠네.)

내가 보기에도 비상시에 의사의 도움을 빨리 받을 체제만 되어 있다면 '병을 고치는' 개념인 의사보다는 '애 낳는 걸 도와주는' 산파가 정상적인 분만을 예상할 수 있는 산모에게는 훨씬 합리적인 선택이 아닌가 한다. 결국 의학의 역할은 위험할 때 개입하는 거지 출산을 주도하는 게 아니니까. 의사라는 게 있기 전에도 애 낳고 살았거든? 여자들이 아이를 낳는 그 기적적인 순간, 자기 신체에 대한 결정권을 잡는 것이야말로 진짜 여성해방 아니겠는가.

덧: 내가 또 울었던 때라면 (그때는 분노였지만) 미국에서 낙태의 자유를 대폭 축소한 법을 합헌 선언한 Gonzales v. Carhart 결정을 읽었을 때였다. 난 출산을 보면 감동에 겨워 눈물을 흘리며, 낙태의 자유를 100% 지지한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 어떤 모순도 없다고 생각한다.
2008/03/06 06:21 2008/03/06 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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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racked from The Adamantine Watchtower of... 2008/03/07 00:14 ERASE

    출산, 낙태에 대한 이것 저것 생각.

    http://www.lokasenna.pe.kr/blog/entry/the-business-of-being-born낙태를 하는 것이 여성에게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산모의 몸 속에서 자라나고 있는 태아를 인위적으로 '제거'

  1. 비밀방문자
    2008/03/07 09:54 PERMALINK EDIT/ERASE REPLY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 2008/03/07 21:39 PERMALINK EDIT/ERASE

      조산원 같은 데가 우리나라에 있는지 몰랐네요. 영화에도 산부인과하고는 또 다른 birth center 얘기도 나오죠. 자연분만을 하면서도 의사의 도움도 바로 받을 수 있는.. 어차피 현대의 산파는 의학 훈련도 받고, 위험이 있어보이면 바로 의사에게 연락하는 역할도 맡지만요. 덕분에 저도 좋은 정보 얻었습니다.

  2. 2008/03/07 14:33 PERMALINK EDIT/ERASE REPLY

    저런 풍조 때문인지, 산모들이 출산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 때문에 처음부터 제왕절개를 쉽게 택하게 된 듯도 해요. 모두들 몸 관리 잘하면서 자연분만하라고 그러지만, 아무래도 겁나니까요 (특히 아기가 평균보다 많이 컸다든가 하면;_;).

    • 2008/03/07 21:43 PERMALINK EDIT/ERASE

      아무래도 출산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작용하죠. 많이 아프기도 할 테고..;_; 집에서 자연분만하던 산모도 밖에서 앰뷸런스 사이렌이 들리니까 '으아 저거 내가 타고갈 차야. 병원에 데려다 줘!' 하더라는데요..ㅋㅋ

  3. haha
    2009/12/16 22:09 PERMALINK EDIT/ERASE REPLY

    이 영화 꼭 한번 보고싶은데 어떻게 해야 볼 수 있을까요?

    • 로키
      2009/12/17 11:31 PERMALINK EDIT/ERASE

      저는 당시 Netflix 계정이 있어서 인터넷으로 봤어요. 온라인 상영관에 다큐멘터리가 많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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