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TV쇼에서 벌어진 루저 발언 파동은 수많은 말과 패러디, 글을 부르면서 이제는 특별히 뭔가 덧붙일 것도 없는 대한민국 방송사의 일부분이 되었다. 정신나간 발언이었고 모욕적인 폭언이었고, 우리 사회 일부에 물든 천박한 허영을 보여주는 사건이라는 점 등등, 다 옳은 말이다.
워낙 상식없는 짓을 했으니 그 말을 한 여학생을, 그리고 그딴 식으로 방향을 유도했거나 대본을 썼을 수도 있는 (그리고 녹화방송인데 편집도 하지 않은) 제작진을 성토하는 것은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저거 나쁜년이고, 제작진들은 정신이 나갔다고 말이다. 하지만 정말 그들만이 문제일까? 우리 건전한 한국사회에서 그런 일부 '정신나간' 사람들을 성토하고 매도하면 루저 발언의 정신적, 언어적 폭력이 없어질까?
한국 사회가 얼마나 획일적이고 계층적인지는 길게 얘기해봐야 입만 (혹은 손만) 아프다. 모두가 똑같은 기준을 강요받고 그 기준을 따라가려고 헐레벌떡 따라가는 사회다. 돈이면 돈, 외모면 외모, 키면 키 다 어떤 이상적인 잣대가 있고, 그 기준은 곧 좋으이며 옳음이며 선이다. 서울은 지방보다 위고, 키가 크면 작은 사람보다 우월하고, 대졸은 고졸보다 낫고,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능가하고, 전문직과 공무원이 최고고, 예뻐야 눈이 간다. (그 미의 기준도 엄청나게 천편일률적이다.) 그 기준에 미치는 사람은 인생의 승리자다. 못 미치면? 루저~
TV에 어쩌다 나온 어린 여자아이의 말 한 마디에 한 나라가 발칵 뒤집힐 이유가 사실 얼마나 되는가. 이도경양보다 훨씬 오래 살고 많은 경험을 하고, 비교도 안 되게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의 발언에도 우리는 그렇게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사람들이 기분이 상한 것은 홍대 다니는 한 여학생이 그들을 루저라고 믿어서가 아니다. 자신이 루저라는 믿음, 혹은 두려움을 그녀가 자극했기 때문이다. 키를 포함한 그 단일하고 이상적인 사회적 기준에 못미치는 자신은 패배자가 아닐까 하는 불안은 우리 모두에게 계속 잠재해 있고, 이번 루저 소동은 그 불안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계기였다.
하나의 외부적 기준에만 자신과 삶을 맞추어야 한다는 강박은 교육, 취업, 의료(?) 분야에서 잘 관찰할 수 있다. 타고난 개성과 매력과 무관하게 자신을 어떤 이상에 맞추려는 그 끝없는 노력의 경주 속에서. 그래서 우리들은 무조건 대학에 가려고 기를 쓰고, 공무원이나 전문직, 그도 아니면 대기업 직원의 감투를 쓰려고 무진장 노력한다. 그리고 역시 타고난 모습과 상관없이 남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려고 얼굴을 뜯어고치고 다이어트를 한다. 경험도, 살아가는 모습도, 심지어 생긴 것도 모두 비슷비슷해지려는 사회적 몸부림은 눈물겹도록 치열하다. 그렇지 않으면 뒤처지니까, 패배자가 되니까.
그래서 나는 (그녀의 발언에 직접 해당사항이 없어 그런지는 몰라도) 이도경이라는 여학생이 불쌍하다. 그녀는 4천만 국민이 모두 쌍둥이가 되기를 꿈꾸는 국가적 대사업의 처연한 얼굴이다. 남의 시선을 강박적으로 의식하고 외적 잣대에 자신을 맞추는 데에 삶을 바치는 와중에 그녀에게는, 그리고 그녀와 마찬가지인 수많은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자신'이 설 자리가 없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 자신의 마음, 자신의 행복은 모두 쓰잘데기없는 패배자적 생각일 뿐일 테니까.
삶의 선택에 자신이 없이 남의 시선이 있을 뿐인 홍대 아가씨는 그래서 딱하다. 그녀의 중심이 외적 잣대가 아닌 자신이었다면 도경양은 경쟁력이니 루저니 하는 말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은 키큰 남자를 좋아한다고, 키작은 남자와도 사귈 수 있지만 키큰 남자가 취향이라고 아무도 업신여기거나 모욕하지 않고 당당히 말했을 테니까. 자신의 취향이 아닌 맞춰야만 하는 외적 잣대가 삶의 기준이 될 때 그것은 다원성이 아닌 폭력이 된다. '나는 ~~를 좋아해'가 아닌 '너는 ~~하지 않으므로 가치가 없어'가 된다. 그래서 획일화는, 그리고 획일화를 향한 강박의 이면은 사회적 폭력이다.
신데렐라 이야기의 원전에는 어린아이들에게 흔히 읽히는 판본에 빠진 대목이 있다. 무도회에 구두만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진 그녀를 찾으러 왕자가 그녀의 구두를 전국 각지로 보내 여자들에게 신어보게 했을 때, 신데렐라의 못된 두 의붓언니는 왕자비가 되는 실마리인 그 구두에 발을 맞추려고 발가락과 발뒤꿈치를 자르고 발을 우겨넣었다. 신분상승과 성공이라는 지상과제 앞에서 그녀들은 자신들의 발 모양이나 크기, 심지어 발의 온전함이나 고통에도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 신발에, 그 잣대에 자신을 맞추는 것만이 중요했다. 그 모습이 오늘날의 성형수술 열풍과 겹치며 오싹했던 사람이 나뿐일까.
외적 잣대가, 타인의 시선이 자신을 압도하는 순간 멀쩡한 발뒤꿈치와 발가락을 잘라내서라도 남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는 일은 너무 당연하게 되어버린다. 자신의 취향, 재능, 꿈, 개성, 건강 같은 별거 아닌 것들을 잘라내고 도려내서 마침내 신데렐라의 신발에 발을 우겨넣을 수 있게 되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는 한, 자신을 잘라낸 고통은 승리의 별거아닌 대가일 뿐일 테니까. 그때에야 자신을 좀먹는 모든 공허와 불안과 너는 패배자라고 속삭이는 목소리에서 자유로울 것이라고 믿어마지 않는다.
내가 너무 구식이고 고리타분한 것일까? 나는 행복은 그런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자신을 개조하려고 해도 결국 외적 기준은 외적 기준일 뿐이고, 자신의 내적 기준은 또 다른 얘기다. 화려함은 외적 기준에 맞추는 데서 나올지 몰라도 행복은 자신의 기준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외적으로 결혼, 직장, 외모 등 모든 것이 완벽한 사람들이 실은 공허와 불행에 시달리기도 하는 것을 따로 설명할 방법이 없다. 자신이 빠진 행복이란 있을 수 없으니까.
내가 생각하는 진짜 패배자는 키가 180이 안 되는 남자들이 아니다. (사실 개인적으로 키큰 남자들한텐 매력을 못 느낀다.) 자기 기준 없이 외적 잣대에, 타인의 시선에 흔들리며 그 획일적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에게 언어적, 정신적 폭력을 휘두르는 그들, 그 불쌍한 사람들이 진짜 루저다. 타인의 시선에서 행복을 찾는 이상 행복할 수도 없고, 뿐만 아니라 남까지 불행하게 하려는 것이 그들이니까. 남의 신발에 맞추려고 자기 발을 잘라내는 것처럼 어처구니 없는 짓, 딱한 루저짓이 또 있을까.
워낙 상식없는 짓을 했으니 그 말을 한 여학생을, 그리고 그딴 식으로 방향을 유도했거나 대본을 썼을 수도 있는 (그리고 녹화방송인데 편집도 하지 않은) 제작진을 성토하는 것은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저거 나쁜년이고, 제작진들은 정신이 나갔다고 말이다. 하지만 정말 그들만이 문제일까? 우리 건전한 한국사회에서 그런 일부 '정신나간' 사람들을 성토하고 매도하면 루저 발언의 정신적, 언어적 폭력이 없어질까?
한국 사회가 얼마나 획일적이고 계층적인지는 길게 얘기해봐야 입만 (혹은 손만) 아프다. 모두가 똑같은 기준을 강요받고 그 기준을 따라가려고 헐레벌떡 따라가는 사회다. 돈이면 돈, 외모면 외모, 키면 키 다 어떤 이상적인 잣대가 있고, 그 기준은 곧 좋으이며 옳음이며 선이다. 서울은 지방보다 위고, 키가 크면 작은 사람보다 우월하고, 대졸은 고졸보다 낫고,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능가하고, 전문직과 공무원이 최고고, 예뻐야 눈이 간다. (그 미의 기준도 엄청나게 천편일률적이다.) 그 기준에 미치는 사람은 인생의 승리자다. 못 미치면? 루저~
TV에 어쩌다 나온 어린 여자아이의 말 한 마디에 한 나라가 발칵 뒤집힐 이유가 사실 얼마나 되는가. 이도경양보다 훨씬 오래 살고 많은 경험을 하고, 비교도 안 되게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의 발언에도 우리는 그렇게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사람들이 기분이 상한 것은 홍대 다니는 한 여학생이 그들을 루저라고 믿어서가 아니다. 자신이 루저라는 믿음, 혹은 두려움을 그녀가 자극했기 때문이다. 키를 포함한 그 단일하고 이상적인 사회적 기준에 못미치는 자신은 패배자가 아닐까 하는 불안은 우리 모두에게 계속 잠재해 있고, 이번 루저 소동은 그 불안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계기였다.
하나의 외부적 기준에만 자신과 삶을 맞추어야 한다는 강박은 교육, 취업, 의료(?) 분야에서 잘 관찰할 수 있다. 타고난 개성과 매력과 무관하게 자신을 어떤 이상에 맞추려는 그 끝없는 노력의 경주 속에서. 그래서 우리들은 무조건 대학에 가려고 기를 쓰고, 공무원이나 전문직, 그도 아니면 대기업 직원의 감투를 쓰려고 무진장 노력한다. 그리고 역시 타고난 모습과 상관없이 남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려고 얼굴을 뜯어고치고 다이어트를 한다. 경험도, 살아가는 모습도, 심지어 생긴 것도 모두 비슷비슷해지려는 사회적 몸부림은 눈물겹도록 치열하다. 그렇지 않으면 뒤처지니까, 패배자가 되니까.
그래서 나는 (그녀의 발언에 직접 해당사항이 없어 그런지는 몰라도) 이도경이라는 여학생이 불쌍하다. 그녀는 4천만 국민이 모두 쌍둥이가 되기를 꿈꾸는 국가적 대사업의 처연한 얼굴이다. 남의 시선을 강박적으로 의식하고 외적 잣대에 자신을 맞추는 데에 삶을 바치는 와중에 그녀에게는, 그리고 그녀와 마찬가지인 수많은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자신'이 설 자리가 없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 자신의 마음, 자신의 행복은 모두 쓰잘데기없는 패배자적 생각일 뿐일 테니까.
삶의 선택에 자신이 없이 남의 시선이 있을 뿐인 홍대 아가씨는 그래서 딱하다. 그녀의 중심이 외적 잣대가 아닌 자신이었다면 도경양은 경쟁력이니 루저니 하는 말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은 키큰 남자를 좋아한다고, 키작은 남자와도 사귈 수 있지만 키큰 남자가 취향이라고 아무도 업신여기거나 모욕하지 않고 당당히 말했을 테니까. 자신의 취향이 아닌 맞춰야만 하는 외적 잣대가 삶의 기준이 될 때 그것은 다원성이 아닌 폭력이 된다. '나는 ~~를 좋아해'가 아닌 '너는 ~~하지 않으므로 가치가 없어'가 된다. 그래서 획일화는, 그리고 획일화를 향한 강박의 이면은 사회적 폭력이다.
신데렐라 이야기의 원전에는 어린아이들에게 흔히 읽히는 판본에 빠진 대목이 있다. 무도회에 구두만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진 그녀를 찾으러 왕자가 그녀의 구두를 전국 각지로 보내 여자들에게 신어보게 했을 때, 신데렐라의 못된 두 의붓언니는 왕자비가 되는 실마리인 그 구두에 발을 맞추려고 발가락과 발뒤꿈치를 자르고 발을 우겨넣었다. 신분상승과 성공이라는 지상과제 앞에서 그녀들은 자신들의 발 모양이나 크기, 심지어 발의 온전함이나 고통에도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 신발에, 그 잣대에 자신을 맞추는 것만이 중요했다. 그 모습이 오늘날의 성형수술 열풍과 겹치며 오싹했던 사람이 나뿐일까.
외적 잣대가, 타인의 시선이 자신을 압도하는 순간 멀쩡한 발뒤꿈치와 발가락을 잘라내서라도 남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는 일은 너무 당연하게 되어버린다. 자신의 취향, 재능, 꿈, 개성, 건강 같은 별거 아닌 것들을 잘라내고 도려내서 마침내 신데렐라의 신발에 발을 우겨넣을 수 있게 되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는 한, 자신을 잘라낸 고통은 승리의 별거아닌 대가일 뿐일 테니까. 그때에야 자신을 좀먹는 모든 공허와 불안과 너는 패배자라고 속삭이는 목소리에서 자유로울 것이라고 믿어마지 않는다.
내가 너무 구식이고 고리타분한 것일까? 나는 행복은 그런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자신을 개조하려고 해도 결국 외적 기준은 외적 기준일 뿐이고, 자신의 내적 기준은 또 다른 얘기다. 화려함은 외적 기준에 맞추는 데서 나올지 몰라도 행복은 자신의 기준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외적으로 결혼, 직장, 외모 등 모든 것이 완벽한 사람들이 실은 공허와 불행에 시달리기도 하는 것을 따로 설명할 방법이 없다. 자신이 빠진 행복이란 있을 수 없으니까.
내가 생각하는 진짜 패배자는 키가 180이 안 되는 남자들이 아니다. (사실 개인적으로 키큰 남자들한텐 매력을 못 느낀다.) 자기 기준 없이 외적 잣대에, 타인의 시선에 흔들리며 그 획일적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에게 언어적, 정신적 폭력을 휘두르는 그들, 그 불쌍한 사람들이 진짜 루저다. 타인의 시선에서 행복을 찾는 이상 행복할 수도 없고, 뿐만 아니라 남까지 불행하게 하려는 것이 그들이니까. 남의 신발에 맞추려고 자기 발을 잘라내는 것처럼 어처구니 없는 짓, 딱한 루저짓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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