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모 생명 구하려 낙태 권고한 수녀 파문
미국 아리조나 피닉스의 한 카톨릭 병원에 찾아온 11주 임신한 산모가 임신을 지속할 경우 산모와 태아 모두 사망할 것이 거의 확실한 상황에서 낙태를 권고한 수녀 마가렛 맥브라이드는 교회에서 파문당했다고 한다. 피닉스 대교구의 주교는 태아는 질병이 아니라며 산모의 목숨은 물론 구해야 하지만 직접 낙태는 그 방법이 될 수 없다고 발표했다.
...나가 죽어라, 이 새끼들아. 그래, 태아가 죽을 김에는 여자도 같이 죽으라 이거냐? 아침부터 기분 X나 잡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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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3/06 인터넷 논쟁에서 이기는(?) 방법 (8)
- 2008/03/07 낙태의 자유에 찬성하는 이유 (20)
- 2007/04/19 개자식들. 개자식들. 개자식들!!! (4)
조지 틸러의 삶과 죽음
TAG 낙태, 시사5월 31일 미국 캔자스에서는 낙태 시술 의사 조지 틸러 (George Tiller)가 평소 다니는 교회에서 총격을 당해 향년 67세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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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를 시술하는 의사가 또 살해당했다는 사실 외에도 낙태의 자유를 주장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 양측에 틸러의 존재는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그는 미국에서 임신 20주 이후의 낙태를 시술하는 단 세 명의 의사 중 하나였기에.
20주 이후의 임신 3분기 태아는 매우 성장한 상태이며, 모체 외에서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경우도 있으므로 가뜩이나 예민한 낙태 사안 중에도 더욱 첨예한 대립이 있는 사안이다. 그래서 틸러의 클리닉은 유달리 심한 시위에 시달렸고, 그는 1993년에 양팔에 총격을 당하기도 했으며, 스토킹을 당하다가 연방 수사관 경호를 근 3년 받았고, 형사소송을 당했다가 무죄 판결이 나기도 했다. 그리고 결국은 교회에서 가족과 친지 눈앞에서 살해당했다.
극심한 시위와 협박에 시달리면서도 그가 일을 계속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돈이 벌리는 것도 분명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훨씬 안전한 일도 많은데도 굳이 낙태 시술을 계속했던 이유를 그는 '여성들에게 내가 필요해서'라고 말했다.
낙태 클리닉과 시술자, 직원에 대한 시위와 폭탄 테러와 암살은 확실히 효과가 있어서, 미국에서는 낙태를 가르치는 의과대학도 줄어들고 있고 그 수많은 어려움을 견디면서 굳이 낙태를 시술하는 의사도 줄고 있다. 결국 낙태 반대론자들은 어느 정도는 성공한 셈이다. 낙태를 살인으로 규정하지는 못했지만 낙태에 대한 접근을 어렵게 만드는 데는 성공했으니까.
그래서 틸러의 죽음은 (살해행위 자체를 비난하면서도) 낙태 반대론자들에게는 승리이다. 적어도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틸러에게 살해당하는 태아는 그만큼 줄어들었을 테니까. 그러나 과연 그럴까? 여성을 위한다는 틸러의 말은 그저 위선에 지나지 않았을까?
낙태를 법으로 금지해서 정말로 태아를 구할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이다. 태아가 사람이건 아니건 간에 산모의 몸속에 있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그 존재를 숨기기도 쉽고, 아무도 모르게 처리할 수도 있다. 그리고 실제로 낙태가 불법을 통해 음성화되면 여자들은 낙태를 포기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수가 몰래 아이를 떼려고 한다. 여자들이 아이를 떼는 건 '심심한데 낙태나 해볼까' 하는 심리가 아니고 도저히 낳을 수가 없는 것이므로 합법이든 불법이든 낙태를 선택하는 거다. 다만, 불법이면 불법 시술자에게 위험하고 비위생적인 시술을 받는 차이가 있다.
그래서 의사가 시술하는 합법적인 낙태는 태아를 죽이는 게 아니라 산모를 살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미래에 아이를 낳기로 선택한다면, 미래의 아이 또한 살리는 행위이다. 태아가 불법으로 위험하게 낙태당한다고 해서 안전하게 의사에게 낙태당하는 것보다 뭐가 나을 게 있는가? 그저 임신한 여성, 그리고 그 여성이 미래에 낳을 수 있을 아이들만 위험해질 뿐이다. 나는 이게 낙태 불법화 주장의 최대 허점이며 도덕적 공허라고 본다.1
그래서 조지 틸러는 여성들에게 자신이 필요하기에 아무리 위험해도 그만둘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총을 맞아도, 가족까지 협박에 시달려도, 클리닉을 요새화해야 할 정도로 시위와 테러 위협이 극심해져도. 그의 사무실 벽에는 환자들의 감사 노트가 즐비하다고 한다. 틸러는 낙태 일을 가리켜 젊음을 앗아가고, 피가 마르도록 지치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자신을 필요로 하는 여성들을 실망시킬 수는 없다고 했다.
틸러에게 3분기 낙태 시술을 받은 한 여성의 이야기가 있다. 9년 전, 미리엄 클라이만은 29주 된 태아의 두뇌에 심각한 이상이 있어서 태내에서, 혹은 출산 직후에 아이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죽어가는 아이를 도저히 두 달 동안 태내에 품고 있을 수 없었던 그녀는 그렇게 늦은 낙태를 시술하는 사람은 없다는 의사에게 빌다시피 해서 틸러의 이름을 받았다. 그리고 남편과 함께 극렬한 시위대를 뚫고 틸러의 요새와 같은 클리닉에 들어가 시술을 받았고, 떼어낸 태아를 집으로 데려와 장례를 치러주었다. 지금 그녀는 두 아들의 어머니이다.
그녀와 그녀의 가족에게 무엇이 옳은 선택이었는지 타인인 우리가 어떻게 얘기할 수 있는가? 어차피 죽을 아이인데 굳이 수술까지 해서 떼어냈어야 했냐고 욕할 수 있는가? 두 달 동안 몸 속에서 아이가 죽기를 기다리며 (그리고 태내에서 죽었으면 어차피 떼어냈어야 했다) 서서히 피가 마르는 게 어머니로서 그녀의 의무였을까? 결국 참지 못하고 낙태가 불법인 나라에서 몰래 불법 수술을 받고 그녀가 감염으로 죽거나 자궁을 들어내서 지금의 두 아들도 영영 태어날 수 없게 되는 땅이 낙태 반대론자들의 유토피아겠지.
사람에 따라서는 남은 두 달만이라도 임신한 채 작별인사를 하기 원했을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클라이만과 마찬가지로 그 상황을 견딜 수가 없다. 어느 쪽이 옳은지 그녀 자신과 가족이 아닌 누가 정하는가? 그리고 아이가 생긴 것을 뒤늦게서야 안 여성에게, 역시 무엇이 옳은지 타인이 정해줄 수 있는가? 도저히 아이를 낳을 수가 없는 상황이 된 여성에게는? 누가 그 결정을 내리는가?
조지 틸러는 여성에게 그 결정을 내릴 권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자의 손에 살해당했다. 반 낙태 단체들은 이 살인을 정죄하면서도 조지 틸러는 대량학살자였다고 강조한다. 천하의 어리석은 바리새인들, 독사의 자식들, 회칠한 무덤 같은 자들. 조지 틸러는 아기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여성을 살리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사실 여성을 돕는 것은 조지 틸러를 죽인 자와 그 사상적 동지들에게는 아기를 학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니 더 무거운 죄이겠지. 여성이 안심하고 건강하게 사는 세상은 권위주의적 통제가 설 곳이 없는 세상이니까. 여성과 섹스를 두려움과 죽음의 위협으로 통제하는 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 억압적 종교·정치적 권력의 근간이었기에.
그리고 그 통제가 약해져가는 것은 권위주의자들에게는 한없이 두려운 일일 것이다. 공포와 미신, 증오가 가득한 그들의 세상이 죽어가는 시대에 그들은 이렇게 폭력으로 맞서 싸우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해도 몰려오는 현대화와 세속화의 파도를 막을 수는 없다는 점이 그들의 비극이다. 그 싸움의 과정에서 조지 틸러처럼 용기있는 사람이 희생당했다는 사실은 더 큰 비극이고.
링크
이전에 썼던 낙태 자유화 찬성 글
낙태 반대운동의 결과 - Unborn in the USA 혹은 Lake of Fire (다큐멘터리)에서 들었다
주석
- 물론 낙태 불법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우선순위 여성 건강이니 생명이니 하는 기능론적 혹은 공리주의적 사고가 아니라 감히 애를 떼려는 더러운 X들이 합당한 대가를 치르는 거니까--감염으로 죽건, 자궁을 들어내건 죄없는 생명을 죽인 대가인 거지--징벌적 사고의 관점에서 본다면 허점은 아니다. 코미디언 조지 칼린이 말했듯 낙태 불법화의 발로는 친생명이 아니라 반여성이다. [돌아가기]
인터넷 논쟁에서 이기는(?) 방법
TAG 낙태, 시사인터넷 논쟁이라는 것은 별 쓸데없는 짓이기는 하지만, 나는 그런 논쟁에서 이긴(..) 적이 두어 번 있다. 정확히는 긴 논쟁 끝에 상대가 더 이상 댓글을 안 달았다는 점에서 일종의 승리라고 할 수 있겠지. 상황이나 어조는 전혀 달랐지만 공통 원리는 있어서 나름 일반화할 수 있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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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 방법은 간단하다. 사안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하면서도 상대를 긍정하는 것. 즉, 사안과 사람을 분리하는 것이다.
예시 1: 유튜브에서 있었던 일. (두 논쟁 다 유튜브 비디오 댓글상이었다. 누가 내 글에 답변하면 이메일 알림이 와서 긴 논쟁이 벌어지기 딱 좋다.) 존 맥케인 패러디 비디오였는데, 그 댓글상에 어쩌다 낙태에 대해서 R이라는 사람과 논쟁이 벌어졌었다. 난 낙태의 자유에 찬성하는 쪽, 상대는 반대하는 쪽. 이게 얼마나 감정적인 사안인지는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R: 로키 당신은 귀에 옷걸이를 꽂고 태어났을지 몰라도 (로키 주: 이게 뭔 소리인지도 잘 모르겠다. 내가 낙태를 광적으로 찬성하는 인간이라는 소리? 낙태하려다 실패해서 태어났다는 얘기? 모욕을 하려면 헷갈리게라도 하지 마 제발.) 인간이라면 자신이나 아기에게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그런 짓을 하려는 인간들은 다 정신병원에 처넣어야 한다. (로키 주: 음, 그래서 낳기 싫은 아이는 정신병원에서 억지로 낳게 하고? 와 멋진 신세계~) 입양만이 방법이다. (로키 주: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데는 동의한다. 그래서 국가에서 강제해야 하는 거구나~ 자기들 편리할 때만 국가 통제를 바라는 극우 보수주의는 멋지지. 그렇게까지 일관성이 없이 살면 얼마나 편해.) 경찰서나 소방서에 아이를 버리고 가도 아무 지장 없는데 어떻게 애를 죽일 수가 있냐. (로키 주: 유기죄라고 들어봤냐? 그런 법을 제정한 주도 있지만 주마다 법이 다른 걸 알기나 하나 몰라.) 불편하거나 심지어 살찌는 게 싫어서 애를 떼는 무책임한 여자들이 문제다. (로키 주: 역시 당신 사는 세상은 참 편한 것 같다. 수많은 여자들의 가슴아픈 사연을 그런 식으로 일축할 수 있으면 얼마나 속편할까.)
뭐 보다시피 난 좀 불만이 많은 발언이었지만 배울 기회로도 삼을 겸 꾹 참고 최대한 논리적으로 논쟁을 시작했다. 나도 낙태는 없으면 없을 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산모의 건강이나 생명에 대해서도 같게 생각하느냐, 낙태는 되도록 없어야 하지만 국가에서 강제하는 것은 방법이 틀렸고 낙태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등등. 논리에서 밀리기 시작하자 뿔이 난 R씨,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셨겠다.
R: '어차피 낙태하는 X들은 대부분 헤프고 술취한 10대X들이다. 죽어도 싸다.'
기억을 더듬어 쓴 것인데, 어쨌든 보는 순간 순간적으로 피가 거꾸로 돌은 건 사실이다. 어떻게 하면 이 인간을 평생 잊지 못할 정도로, 아니 죽고 싶을 정도로 모욕해줄 수 있을까 하는 궁리를 잠시 했다.
그리고 나서 다시 생각을 했다. 어차피 내가 알지도 못하는 극우 찌질이가 지껄이는 소리가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고 내가 감정을 낭비해야 하지? 브루스 스털링 (Bruce Sterling) 등이 쓴 '어려운 대화' (Difficult Conversations)라는 책을 읽었던 나는 R의 저런 말들이 내 자아 정체성을 건드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R은 나더러 유아 살해를 지지하는 비도덕적인 인간이라고 말하고 있었고, 여성 생명의 가치조차 평가절하하고 있었다. 따라서 난 그의 공격 앞에서 내 정체성을 지키려고 그를 역으로 공격하고 싶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얼마나 많은 정치적 논쟁, 얼마나 많은 인간관계가 이런 식인지!
그리고 역시 '어려운 대화'에 나온 내용을 생각하며 R의 관점과 R이 그런 말을 한 이유는 내가 생각하는 것과 사뭇 다를 수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R과 나는 자라온 환경과 경험도 다르고, 생각하는 것도 전혀 다르다. 따라서 같은 상황에 대해서도 같은 상황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판단이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보기에 R은 낙태를 줄일 수도 없는 억압적이고 위험한 국가정책을 주장하고 있지만, R은 태아가, 아기가 죽어가는 상황이 너무 안타깝고 슬픈 거다. 그리고 그런 것을 합법이라고 하는 국가정책은 부도덕하다고 느끼고, 그런 정책을 지지하는 사람들 때문에 자기 정체성에 얼마든지 위협을 느낄 수 있다. 따라서 죽어가는 아이들을 지킬 수 없는 자신의 무력감, 생명의 가치가 평가절하당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그 고통에 대응해 방어적 공격성으로 나를, 그리고 낙태를 하는 여성을 마음 속에 악으로 추상화해서 공격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을 하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우선 나의 정체성은 R의 언행과 무관하므로 R의 행동에 내가 흥분을 하거나 위협받을 필요도 없었고, R의 동기에 대해 생각해 보니 그와 여전히 의견은 달랐지만 그를 이해할 수 있었고 공감을 할 수도 있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댓글을 썼다.
로키: R님 댓글은 잘 보았습니다. 합법적으로 죽어가는 태아에 대한 R님의 안타까움이 얼마나 크면 그렇게 공격적인 글을 썼겠어요. 통계에 따르면 낙태시술을 받는 여성 중 10대의 비율은 17%로서 R님의 얘기처럼 대부분은 아니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겠지요. 이미 말했듯 저도 낙태는 적을 수록 좋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낙태를 할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사연이 있는 여성에 대한 적대감이나 국가의 강제는 그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R은 이후 침묵했다. 무엇보다 그의 찌질한 글의 도착을 알리는 이메일이 더 이상 없는 것이 기뻤지만, 한편으로 내 글을 본 그의 생각이 어땠을까 궁금했다. 그의 주장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를 근본적으로 좋은 사람으로 생각한다는 것, 사안에 대해서는 반목하지만 사람으로서는 긍정한다는 것이 어떤 기분이었을까? 하지만 적어도 글을 더 달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는 것은 더 이상 나에게 위협을 못 느끼는 의미라고 해석할 수 있었다.
R은 아마 앞으로도 낙태 합법화 폐지를 주장할 것이다. 그건 또 그것대로 좋다. 낙태의 부작용에 대한 환기는 늘 필요하고, 관점의 다양성도 필요하니까. 모든 사람이 나와 의견이 같은 세상이란 얼마나 따분한가. 하지만 그 사안과는 별개로 좋은 사람이라는 긍정을 반대편에게 받았다는 점이 자아 정체성에 대한 R의 위협감을 좀 줄였기를 바란다. 자아 정체성을 방어할 필요를 덜 느끼는 만큼, 즉 두려움이 줄은 만큼 그는 상대편을 덜 공격하고, 더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 테니까. 낙태의 자유를 찬성하는 사람 중에도 자신을 긍정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낙태 자유 찬성론자에 대한 R의 고정관념을 조금이라도 바꾸었다면 그는 의견이 다른 사람과 좀 더 건설적으로 이야기하고 협력할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그럴 수 없다면 그런 그의 미숙함이 안타깝지만, 역시 그의 미숙함은 그의 의견만큼이나 나에게는 아무 위협이 없다.
사안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반대할 수 있다. 그리고 반대하면서도 얼마든지 상대방과는 예의바르고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사안과 사람을 분리하면 그게 가능하다. 그리고 그 분리가 안 되는 사람에게는 그 분리를 몸소 보여주면 상대도 깨달을 수 있다.
예시 2: 이번 논쟁은 논조나 말투는 사뭇 달랐지만 원리는 같다. 미국 상원의 테드 케네디 의원 (JFK의 동생이며 '진보의 사자'라고 하는 민주당 의원)이 뇌종양 판정을 받고 입원했을 때였다. 케네디 의원 관련 비디오에 댓글을 달았더니 거기에 이런 댓글이 달렸다.
G: 케네디는 부와 지위를 이용해 살인을 은폐한 놈이다. 장례식에서 보자고!
역시 피가 거꾸로 도는 순간이었다. 로키의 대응은 빨랐다. (시간상으로는 예시 1보다 이전이어서 인격 수양이 덜 됐었나보다.)
로키: 당장 꺼져, 이 찌질한 새X야.
신이 났는지 G는 케네디 의원에 대한 의혹을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역시 이때도 생각을 했다. 수십 년 전, 젊은 여성의 죽음과 관련해서 케네디 의원에 대한 의혹이 있는 건 사실이다. 그 점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는 것은 특히 케네디 의원이 눈엣가시인 우익으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공인인 만큼 그런 점에 대해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정당하다. 하지만 좌이든 우든, 누가 됐건간에 '장례식에서 보자' 하는 식으로 병든 노인에 대해 고소해하는 것은 인간의 도를 넘어선 일이다. 그래서 다시 댓글을 썼다.
로키: G 당신 말대로 케네디 의원의 전적에 대해 의문을 얼마든지 제기할 수 있다. 두 형을 연달아 잃은 그 시절에 그가 어떤 일을 겪고 또 했는지는 정당한 공적 사안이다. 그렇다고 그가 위독한 순간에 노인의 죽음을 바란다고? 다시 말하지. 꺼져, 이 찌질한 새X야.
G는 내 글에 다시 댓글을 달지 않았다. 그가 제기하는 의문이 정당하다는 것을 인정해준 것으로 그는 아마 긍정받은 느낌이 들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어쩌면 그는 케네디처럼 의혹이 있는 인물이 존경받는 사회적 인사이며, 특히 병 때문에 갑자기 좌우를 막론하고 위로와 찬사를 받는 상황이 참기 어려웠을 수도 있다. G가 생각하기에 그 불의는 그의 자아 정체성을 건드렸기에 그는 그런 도가 넘는 글을 달았을 것이다. 그 의문의 정당성을 인정받자 좀 욕을 먹어도 물러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반론의 여지 없이 지나친 말이었다는 것은 자신도 알고 있었겠지만, 위협감에 시달리는 동안에는 미처 할 수 없는 생각이었겠지.
두려움이란 이래서 무섭다. 그 두려움을 자극하는 대신 사안에 대해서는 의견이 달라도 사람을 긍정해서 두려움에서 이끌어내 주는 것만으로도 상대는 다시 정상적인 사고를 되찾을 수 있으며, 피차 소모적인 논쟁이 길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이게 내가 인터넷 논쟁에서 '이긴' 예이다. 하잘것없는 사건들이었지만 확실히 뭔가 배우긴 했다. 사람은 무엇보다 자신을 부정당하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두려움 때문에 별 소리를, 때로는 별 짓을 다 한다는 것을. 역시 요다옹 말씀마따나 두려움은 다크포스의 근원인 것이다. 자신을 부정당하는 두려움에서 한 발짝 벗어나 사안과 사람을 분리해서, 사안에 대해서는 반대하되 사람은 긍정해 준다면 상대 역시 그 두려움에서 구제해줄 수 있다. 그렇게 하면 비로소 서로 이성을 찾고 건설적인 대화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럴 수 있다면 인터넷 토론은 더 이상 쓰잘데기 없는 짓이 아니게 될 지도 모른다.
낙태의 자유에 찬성하는 이유
TAG 낙태, 시사낙태와 출산에 대한 승한님의 글을 보고 낙태에 대한 내 평소 입장을 정리해보자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낙태의 자유에 찬성하는 이유는 첫 번째는 법적이고 도덕적인 것이고, 두 번째는 건강과 안전상의 이유, 세 번째는 저소득층 여성에게 미치는 영향 때문이다.
첫 번째, 법적이고 도덕적인 이유. 여자의 신체 내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다른 사람이 개입할 수는 없다. 낙태는 각 여성이 내리는 절대 쉽지 않은 결정이고, 심사숙고 끝에 결국 낙태를 하기로 했다면 그 결정은 존중받아야 한다. 불행한 선택이고 위험한 수술이고 안하면 안할 수록 좋지만, 결국은 개인의 결정이니까. 낳으려는 아이를 강제로 낙태시키는 것이 옳지 못하듯 낳지 않으려는데 억지로 낳게 하는 것도 불의하다.
태아도 생명인데 그게 어떻게 여자만의 결정일 수 있느냐고? 태아도 인간인가 하는 심오한 질문에 대해 나는 답을 모른다. 별로 종교적인 인간도 아닌 나는 그런 질문에 확답을 제시할 지식이나 지혜, 혹은 오만 같은 건 없다. 그러나 백 보 양보해서 태아가 인간이라고 쳐도 낙태의 자유에는 찬성한다.
어째서냐고? 그건 두 번째, 낙태 금지의 효용과 여성의 건강 때문이다. 낙태를 범죄화해서 적극 집행하며 막는다 해도 어차피 태아를 구하지는 못한다. 대신 여성 건강과 안전에는 치명적이다. 낙태가 음성화될 수록 전문의는 수술을 꺼리고, 자격이 없는 시술자가 하는 불법 시술이 늘어나고, 그로 인한 피해도 늘어난다. 불법 시술로 피해를 입어도 제대로 의사한테 얘기할 수조차 없어지므로 더욱 위험하다.
낙태 금지론자들은 낙태당한 태아의 사진을 들이대며 이걸 합법화하자는 얘기냐고 윽박지른다. 예를 들어 접어놓은 사진은 7개월 된 태아를 낙태해서 버린 모습이라고 한다.
보기만 해도 욕지기가 나오지만 내 의견에 책임을 진다면 피할 수 없다. 그래, 난 저런 것을 합법화하자고 찬성하고 있다. 그래서 독자는 접어놓을 수 있지만 난 저 사진을 똑바로 보며 글을 치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끔찍한 사진을 봐도, 울고 싶어지고 토하고 싶어져도 나는 낙태의 자유에 찬성한다. 낙태를 금지하고 여자들과 의사들을 감옥에 처넣어도 저런 사진은 피할 수 없으니까. (낙태한 태아는 좀 더 존중해서 다뤄주는 게 좋다고 생각하지만.) 그러기는커녕 불법 낙태로 다치고 죽고 불구가 된 여성의 사진을 나란히 놓게 될 테니까.
낙태는 결코 쉽거나 가벼운 결정이 아니다. 낙태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여성은 낙태가 금지당한 나라에서도 무슨 짓이든 한다. 예를 들어 엘 살바도르에서는 산모의 건강이나 생명에 대한 예외도, 강간이고 뭐고 어떤 예외도 없이 낙태가 불법이다. 우리나라처럼 대충 봐주는 게 아니라 적극 집행해서 수많은 여자들이 낙태죄로 잡혀들어간다.1
세계에서 낙태 법률과 집행이 제일 엄격한 그런 엘 살바도르에서조차 여자들은 낙태를 한다. 불법 시술로 심한 감염에 시달리기도 하고, 죽거나 불구가 되기도 하지만 도저히 낳을 수가 없으니까. 게다가 엄격한 카톨릭 국가에서 피임 실태는 또 어떻겠으며... 심지어 임신 3개월 전이라면 특정 브랜드의 위궤양 약을 질에 삽입해서 자연적으로 보이는 유산을 유발한 후 병원에 가는 방법마저 있다.
이러니 어떻게 낙태의 자유에 반대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낙태를 금지하면 여자들은 더 위험해지고, 더 비참해지고, 그나마 태아는 구하지도 못하는데. 이게 낙태 금지론의 최대 허점이라고 본다.
낙태의 자유를 찬성하는 세 번째 이유는 낙태를 금지하면 저소득층 여성에게 제일 피해가 크다는 점 때문이다. 나같은 중산층 이상 여자들은 사실 법으로 낙태를 금지하든 말든 큰 상관 없다. 외국에 나갈 수도 있고, 국내에서도 인맥을 통해 안전하게, 몰래 수술받을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할 수 없는 건 가장 취약한 위치에 있는 여성들이다. 그래서 낙태시술은 무조건 양성화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가진 것 없고 백 없는 여성들의 피해가 너무 크니까.
물론 나는 낙태의 '자유'를 찬성하지 '낙태'에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낙태는 보지 않고 하는 위험한 수술이며, 여성의 신체와 정신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 나도 승한님과 마찬가지로 피임 교육과 피임 수단 도입, 연구를 활성화해서 낙태를 줄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가정과 아동에 대한 지원을 통해 여자들이 경제적인 이유로 낙태를 하는 일이 줄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입양을 늘려서 아이를 키울 수 없는 여성들도 아이를 낳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본다.
더 나아가 심한 심리적 압박감에 시달리는 이들 여성에 대한 심리 상담, 낙태의 영향과 대안에 대한 정보 제공을 통해서 안정된 마음으로 모든 정보를 고려해 최선의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도와줘야 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한 후에도 낙태를 할 수밖에 없는 여성은 합법적으로, 안전하게 수술받아야 한다. 그게 어떤 낙태 금지보다 많은 태아와 여성을 구하는 길 아닌가. 그래서 나는 낙태의 자유에 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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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법적이고 도덕적인 이유. 여자의 신체 내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다른 사람이 개입할 수는 없다. 낙태는 각 여성이 내리는 절대 쉽지 않은 결정이고, 심사숙고 끝에 결국 낙태를 하기로 했다면 그 결정은 존중받아야 한다. 불행한 선택이고 위험한 수술이고 안하면 안할 수록 좋지만, 결국은 개인의 결정이니까. 낳으려는 아이를 강제로 낙태시키는 것이 옳지 못하듯 낳지 않으려는데 억지로 낳게 하는 것도 불의하다.
태아도 생명인데 그게 어떻게 여자만의 결정일 수 있느냐고? 태아도 인간인가 하는 심오한 질문에 대해 나는 답을 모른다. 별로 종교적인 인간도 아닌 나는 그런 질문에 확답을 제시할 지식이나 지혜, 혹은 오만 같은 건 없다. 그러나 백 보 양보해서 태아가 인간이라고 쳐도 낙태의 자유에는 찬성한다.
어째서냐고? 그건 두 번째, 낙태 금지의 효용과 여성의 건강 때문이다. 낙태를 범죄화해서 적극 집행하며 막는다 해도 어차피 태아를 구하지는 못한다. 대신 여성 건강과 안전에는 치명적이다. 낙태가 음성화될 수록 전문의는 수술을 꺼리고, 자격이 없는 시술자가 하는 불법 시술이 늘어나고, 그로 인한 피해도 늘어난다. 불법 시술로 피해를 입어도 제대로 의사한테 얘기할 수조차 없어지므로 더욱 위험하다.
낙태 금지론자들은 낙태당한 태아의 사진을 들이대며 이걸 합법화하자는 얘기냐고 윽박지른다. 예를 들어 접어놓은 사진은 7개월 된 태아를 낙태해서 버린 모습이라고 한다.
매우 끔찍하므로 함부로 펼치지 말 것.
보기만 해도 욕지기가 나오지만 내 의견에 책임을 진다면 피할 수 없다. 그래, 난 저런 것을 합법화하자고 찬성하고 있다. 그래서 독자는 접어놓을 수 있지만 난 저 사진을 똑바로 보며 글을 치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끔찍한 사진을 봐도, 울고 싶어지고 토하고 싶어져도 나는 낙태의 자유에 찬성한다. 낙태를 금지하고 여자들과 의사들을 감옥에 처넣어도 저런 사진은 피할 수 없으니까. (낙태한 태아는 좀 더 존중해서 다뤄주는 게 좋다고 생각하지만.) 그러기는커녕 불법 낙태로 다치고 죽고 불구가 된 여성의 사진을 나란히 놓게 될 테니까.
낙태는 결코 쉽거나 가벼운 결정이 아니다. 낙태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여성은 낙태가 금지당한 나라에서도 무슨 짓이든 한다. 예를 들어 엘 살바도르에서는 산모의 건강이나 생명에 대한 예외도, 강간이고 뭐고 어떤 예외도 없이 낙태가 불법이다. 우리나라처럼 대충 봐주는 게 아니라 적극 집행해서 수많은 여자들이 낙태죄로 잡혀들어간다.1
세계에서 낙태 법률과 집행이 제일 엄격한 그런 엘 살바도르에서조차 여자들은 낙태를 한다. 불법 시술로 심한 감염에 시달리기도 하고, 죽거나 불구가 되기도 하지만 도저히 낳을 수가 없으니까. 게다가 엄격한 카톨릭 국가에서 피임 실태는 또 어떻겠으며... 심지어 임신 3개월 전이라면 특정 브랜드의 위궤양 약을 질에 삽입해서 자연적으로 보이는 유산을 유발한 후 병원에 가는 방법마저 있다.
이러니 어떻게 낙태의 자유에 반대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낙태를 금지하면 여자들은 더 위험해지고, 더 비참해지고, 그나마 태아는 구하지도 못하는데. 이게 낙태 금지론의 최대 허점이라고 본다.
낙태의 자유를 찬성하는 세 번째 이유는 낙태를 금지하면 저소득층 여성에게 제일 피해가 크다는 점 때문이다. 나같은 중산층 이상 여자들은 사실 법으로 낙태를 금지하든 말든 큰 상관 없다. 외국에 나갈 수도 있고, 국내에서도 인맥을 통해 안전하게, 몰래 수술받을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할 수 없는 건 가장 취약한 위치에 있는 여성들이다. 그래서 낙태시술은 무조건 양성화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가진 것 없고 백 없는 여성들의 피해가 너무 크니까.
물론 나는 낙태의 '자유'를 찬성하지 '낙태'에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낙태는 보지 않고 하는 위험한 수술이며, 여성의 신체와 정신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 나도 승한님과 마찬가지로 피임 교육과 피임 수단 도입, 연구를 활성화해서 낙태를 줄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가정과 아동에 대한 지원을 통해 여자들이 경제적인 이유로 낙태를 하는 일이 줄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입양을 늘려서 아이를 키울 수 없는 여성들도 아이를 낳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본다.
더 나아가 심한 심리적 압박감에 시달리는 이들 여성에 대한 심리 상담, 낙태의 영향과 대안에 대한 정보 제공을 통해서 안정된 마음으로 모든 정보를 고려해 최선의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도와줘야 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한 후에도 낙태를 할 수밖에 없는 여성은 합법적으로, 안전하게 수술받아야 한다. 그게 어떤 낙태 금지보다 많은 태아와 여성을 구하는 길 아닌가. 그래서 나는 낙태의 자유에 찬성한다.
주석
- 의사가 환자를 고발할 의무도 있으므로 의료윤리상으로도 문제가 많고, 한 마디로 엉망.
심지어는 태아가 살 가능성이 없는 자궁 외 임신마저도 바로 수술하면 위험을 피할 수 있는데 태아의 심장박동이 있는 한 낙태할 수 없으므로 태아 심장박동이 없어지거나 난관 파열 등 산모 생명에 직접적 위기가 닥쳐야 수술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산부인과 의사는 자궁외 임신은 제일 경험이 없는 의료기사에게 보낸다고 한다. 실력이 없으면 심장박동을 못 찾아낼지도 모르니까. 그런 상황에는 '실수로' 심장 박동을 못 찾아내는 의료기사도 있지 않을까. [돌아가기]
개자식들. 개자식들. 개자식들!!!
TAG 낙태, 시사버지니아 공대 총격만으로는 부족했나보다. 이런 거지같은 한 주를 시작하느라 며칠 전에 기분이 그렇게도 안좋았나. 미국 연방대법원의 다섯 대법관들이 Gonzales v. Carhart (영문 판결, PDF링크, 읽으면서 혈압상승의 위험 있음) 사건 판결을 내렸다. 보수적인 잘난 다섯 개자식 남자 대법관님 나으리들에 의하면 2003년의 부분출산 낙태 금지법이 합헌이시란다.
의사의 판단에 따르면 가장 안전할지도 모르는 낙태 시술을 모체의 건강에 대해 어떤 예외도 인정하지 않고 금지해? 오직 생명에 위협이 있을 때만 예외가 인정된다고? 당신들하고 미국 의회가 의사야?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있어? 세상에, 의사들도 의견이 갈린다는 이유로 산모에게 의학적 위험이 없다고 해버리는 사람이 어딨냐고! 의사들의 의견이 갈리면 위험이 있을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게 정상 아냐?! 자기들 마음에 드는 의학적 증언만 인정하는 게 제대로 된 법적 판단이야? 아니, 그걸 떠나서 그게 양심있는 인간의 태도야?
아, 그래, 당신들 고매한 남자들이 아닌 여자들, 그것도 여자에게 주어진 생물학적, 사회적, 도덕적 의무를 저버리고 감히 신성한 태아를 살해하려는 더러운 년들의 건강에 대한 위협이라 이거지. 그러니까 상관없다 이거지! 이제 자격증 있는 의사들이 감옥갈까 무서워서 임신 3개월 이후의 낙태시술을 거부하면, 아이를 도저히 낳을 수 없는 그 더러운 년들이 이번엔 누구한테 찾아가서 애를 떼려고 할지, 어떤 방법을 사용하다가 죽고 다치든 상관도 없다 이거지!
이 세상에 애를, 자기 애를 좋아서 떼는 여자가 있는줄 알아?! 어떤 상황에서 그런 결정을 내리는지 당신들이 아냐고! 그 수많은 불쌍한 여자들의 피를 그 법복에 묻히고도, 단 하나의 태아도 구하지 못하는 결정을 내려놓고선 미국의 양심을 지켜냈다고 좋아할 대법관이란 인간들을 생각하면...!
물론 5:4 결정이다. 반대의견을 읽기 전에도 이미 그 4인이 누구인지는 뻔했지만. 긴스버그, 수터, 스티븐즈, 브라이어의 이름을 확인하고 혼자 웃으면서도 왠지 눈물이 나왔다. (그래, 나 법원 판결문 보면서 혼자 울고 웃는 여자다, 어쩔래. ㅋㅋ) 이 나라에, 내 나라는 아니지만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하는 미국이라는 나라에 양심은 아직 살아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매우 적합하게도(..?) 반대의견 작성자는 긴스버그 대법관이었다. 다수의견을 봐버린 눈을 씻어주는 기분이었달까.
왠지 몇주 전에 우리학교에서 강연했던 라인하트 고등법원 판사가 생각난다. 기본권의 확장을 가져왔던 워렌 대법원 시절을 그리워하며 요즘의 보수주의를 개탄하고, 다시 한번 법원에, 그리고 미국 사회에 인권과 양심이 설 자리가 있어야 한다고 2~30대의 학생들에게 역설하던 60대 진보주의자의 모습은 꽤나 인상깊었지. 지금쯤 판결문 보면서 그 할아버지가 얼마나 탄식하고 있을지 생각하면 참.
에휴... 기분이 참 그렇다. 이거 가지고 열내다 보니까 어느새 또 잘시간이..(..) 시험은 하루하루 다가오는데 말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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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의 판단에 따르면 가장 안전할지도 모르는 낙태 시술을 모체의 건강에 대해 어떤 예외도 인정하지 않고 금지해? 오직 생명에 위협이 있을 때만 예외가 인정된다고? 당신들하고 미국 의회가 의사야?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있어? 세상에, 의사들도 의견이 갈린다는 이유로 산모에게 의학적 위험이 없다고 해버리는 사람이 어딨냐고! 의사들의 의견이 갈리면 위험이 있을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게 정상 아냐?! 자기들 마음에 드는 의학적 증언만 인정하는 게 제대로 된 법적 판단이야? 아니, 그걸 떠나서 그게 양심있는 인간의 태도야?
아, 그래, 당신들 고매한 남자들이 아닌 여자들, 그것도 여자에게 주어진 생물학적, 사회적, 도덕적 의무를 저버리고 감히 신성한 태아를 살해하려는 더러운 년들의 건강에 대한 위협이라 이거지. 그러니까 상관없다 이거지! 이제 자격증 있는 의사들이 감옥갈까 무서워서 임신 3개월 이후의 낙태시술을 거부하면, 아이를 도저히 낳을 수 없는 그 더러운 년들이 이번엔 누구한테 찾아가서 애를 떼려고 할지, 어떤 방법을 사용하다가 죽고 다치든 상관도 없다 이거지!
이 세상에 애를, 자기 애를 좋아서 떼는 여자가 있는줄 알아?! 어떤 상황에서 그런 결정을 내리는지 당신들이 아냐고! 그 수많은 불쌍한 여자들의 피를 그 법복에 묻히고도, 단 하나의 태아도 구하지 못하는 결정을 내려놓고선 미국의 양심을 지켜냈다고 좋아할 대법관이란 인간들을 생각하면...!

긴스버그 대법관
왠지 몇주 전에 우리학교에서 강연했던 라인하트 고등법원 판사가 생각난다. 기본권의 확장을 가져왔던 워렌 대법원 시절을 그리워하며 요즘의 보수주의를 개탄하고, 다시 한번 법원에, 그리고 미국 사회에 인권과 양심이 설 자리가 있어야 한다고 2~30대의 학생들에게 역설하던 60대 진보주의자의 모습은 꽤나 인상깊었지. 지금쯤 판결문 보면서 그 할아버지가 얼마나 탄식하고 있을지 생각하면 참.
에휴... 기분이 참 그렇다. 이거 가지고 열내다 보니까 어느새 또 잘시간이..(..) 시험은 하루하루 다가오는데 말이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