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을 위한 미국식 라이트 노벨: 드레스덴 파일

2009/02/24 09:44  로키 TAG
시리즈 중 Dead Beat 표지

해리 드레스덴 면상

짐 부처 (Jim Butcher)의 드레스덴 파일(Dresden Files) 시리즈는 장르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이다. 우선 주인공인 해리 드레스덴이 마법사이고 마법이 있는 사회를 다룬다는 점에서는 판타지이지만, 그게 또 현대 시카고를 꽤 실감나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는 마냥 딴세계 얘기는 아니다. 굳이 정의하면 모던 판타지? 여기에 더해 추리물, 특히 주인공이 사설탐정이며 경찰 컨설턴트라는 점에서 하드보일드에 경찰물 성격도 있다. 더불어 갈수록 무기와 전투를 많이 다루는 등 액션과 군사물 성격도 보인다.

마법이 실존하는 현대라는 대목에서 또 다른 해리(...)를 떠올리는 이도 많겠지만, 마법 세계를 주로 다룬 해리 포터 시리즈와 달리 드레스덴 파일은 현실 세계에 마법을 섞어넣은 느낌이 더 강하다. 초자연의 존재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뱀파이어가 고급 창녀집을 운영하고 웨어울프 갱이 돌아다니는 시카고의 모습이 꽤나 생생해서 재미있다.

마법의 존재를 믿지 않는 현대와 공존하는 초자연 세계의 풍부한 설정 때문에 나는 개인적으로 드레스덴 파일을 라이트 노벨로 꼽는다. 주인공이 마법사이면서 탐정이기에 각 소설 초반부에 사건이 벌어지면 주인공은 조사를 시작하는데, 그 과정에서 초자연 설정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뱀파이어와 웨어울프의 종류라든지 마법의 계율, 요정들의 대립관계 등 시리즈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들 설정은 실화와 민담, 현대 판타지와 작가의 상상력을 잘 조합하고 있다.

드레스덴을 라이트 노벨로 꼽는 또 다른 이유는 풍부한 인물성 때문이다. 드레스덴과 그의 형사 친구 머피를 주축으로 해서 꽤 많은 인물이 고정적으로 혹은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하나하나 색채와 능력이 뚜렷해서 변화와 활약, 그리고 관계를 지켜보는 재미가 있다. 각자 강하지만 결코 완벽하지 않은 불완전성이 공감하기 쉬운 인물 군상은 최고의 재미거리 중 하나. 많은 경우 악역도 입체적이고 복합적이다.

라이트 노벨 성격이 강하면서도 어른도 충분히 재미있게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등장인물들이 겪는 갈등과 어려움이 종종 복잡하고 현실적인 것이라서 그렇다. 경찰 내의 다툼, '먹이'에 대해 진심이 되어버린 뱀파이어의 애절한 사랑, 해리 드레스덴 자신의 불우한 연애내력, 마법을 통한 권력의 유혹, 무고한 사람을 구하려고 범죄자와 손을 잡는 도덕적 고민, 그리고 지긋지긋한 생계문제 등 어른도 공감할 수 있는 갈등의 요소가 산재해 있다.

그렇다고 해서 허구헌날 땅을 파고드는 이야기는 아니어서, 심각한 고민에다가 유머와 액션을 섞는 부처의 글솜씨도 볼만하다. 삶 자체가 아무리 어두운 순간에도 우스운 일이 있는데, 소설이라고 끝없이 어둡기만 하면 와닿을 리 없다는 게 내 지론이다. 그런 의미에서 부처의 재치있는 문체와 대사는 꽤 마음에 들었다. 활극 묘사도 실감이 나고 (나중 권을 보면 무기와 무술에 대해 많이 조사한 티가 난다), 추리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구성 역시 치밀하며, 권을 거듭하면서 점점 서사의 규모가 커지고 이야기가 깊어진다. 이렇듯 다채롭게 잘 쓴 글이 드레스덴 파일을 끌어가는 동력이다.

꽤 괜찮은 작품이지만 아직 번역 출간되지 않은 것이 나름 이해가 가는 것이, 보편적인 재미도 물론 있지만 드레스덴 파일은 상당히 미국 냄새가 짙은 작품이기도 하다. 집세 못 내서 전전긍긍하고, 버려진 창고나 후미진 뒷골목에서 주먹질이나 총격전을 벌이고, 뻣뻣한 경찰과 신경전을 벌이고, 유사시에는 고물차를 몰고 급히 탈출하는 등 옛날 펄프 탐정물의 전형이 많이 보인다. 드레스덴 주변에 왠지 미녀가 많이 나타나고, 그녀들이 몰고오는 사건 때문에 주인공이 죽을 고생하는 모습에 향수어린 쓴웃음을 짓지 못한다면 이 시리즈의, 특히 시리즈 초반의 재미는 좀 줄어들 것이다. (점점 이야기가 심각해지면서 장르 전형 패러디가 많이 적어지기는 한다.)

드레스덴 파일 TV 드라마 포스터

TV로 간 해리. 뒤에 머피는 왜저리 음침한지.

물론 어떤 작품이든 문화의 영향은 받지만, 드레스덴 파일은 해리 포터처럼 비상식적으로 많이 팔린 책도 아니고 딱히 아동이나 청소년 독자를 기대할 수도 없다 보니, 특히 불황기를 겪는 한 국내 출간은 한동안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다. 한 마디로 드레스덴 파일은 어느 정도 고정적인 장르물 독자층, 그것도 성인 독자층을 기대할 수 있는 시장에 나올 만한 작품이 아닌가 한다.

그래도 미국인들, 정확히는 미국 기크 (Geek) 구미에 맞을 만한 작품이기는 해서 그 인기를 증명하듯 Scifi Channel에서 TV 시리즈가 나오기도 했는데, 이건 개인적으로 추천하지 않는다. 그냥 무난하긴 한데 원작의 재미를 살리기에는 많이 떨어진다. 정말로 괜찮게 만들려고 했으면 많은 재해석과 고민을 거쳤어야 할 텐데 그런 노력이 보이지 않고 원작의 겉모습만 적당히 따온 느낌. 원작의 분위기나 깊이는 전혀 없지만 내가 너무 까다로워서 그럴 수도 있고, 보려는 사람 도시락 싸갖고 다니며 말릴 정도는 아니다.

원작인 드레스덴 파일에도 마음에 안 드는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글에는 가끔 1인칭 시점을 잘 활용하지 못하는 등의 허점이 보이기도 한다. 애당초 1인칭은 좀 다루기 어려운 시점이기도 한데 그걸로 수 권이나 소설을 써제끼려니 어렵기도 할 것이다. 한편, 특히 최근에 이야기가 심각해지면서 9권에서 해리와 타락천사의 대화에서처럼 가끔 글이 설교조로 가는 것 같아서 좀 마음에 안 든다. 하지만 어차피 완벽한 책이란 없고, 흠이 있어도 전체적으로 우수한 시리즈라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잘 쓴 대중소설이자 성인이 볼만한 모던 판타지를 보고 싶다면 드레스덴 파일은 권할 만한 작품이다. 탐정물도 좋아한다면 더욱 그렇다. 예상을 깨고 국내에 나올 수도 있고, 크게 어렵지 않은 문체이니 원어로 읽을만도 하다. 해리라는 이름의 고아 마법사 얘기는 지겨워서 못 보겠다는 게 아니라면 한 번쯤 집어들고 설정과 인물, 정교한 구성의 재미에 빠져볼만 하다. 어른을 위한 미국식 라이트 노벨, 드레스덴 파일의 세계로.
2009/02/24 09:44 2009/02/24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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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hovamp
    2009/02/24 09:59 PERMALINK EDIT/ERASE REPLY

    오오, 책 추천을 부탁하니 독후감도 나오고, 이래서 대화는 좋은 것이었습니다! [...]
    토요일에 가급적 맛난 걸 진상해 볼게요 ㅋㅋ

  2. Xenosia
    2009/02/24 10:23 PERMALINK EDIT/ERASE REPLY

    선생님, RPG가 하고 싶어요 [..]

    [저번주에 철야한 1人]

    • 로키
      2009/02/25 18:12 PERMALINK EDIT/ERASE

      그 그런 슬픈..(크흑) 언제 또 같이 플레이해요~

  3. 2009/02/24 22:04 PERMALINK EDIT/ERASE REPLY

    오오. 끌리는데요. 모던 환타지라~ :D
    6월 지나서 미국에 가면 한번 구해볼까요... ㅎㅎ

    • 로키
      2009/02/25 18:13 PERMALINK EDIT/ERASE

      시간 되고 심심하면 한 번 볼만하지..ㅋㅋ

  4. 2009/02/25 10:59 PERMALINK EDIT/ERASE REPLY

    그러고보니, 드레스덴 파일도 FATE 3.0 기반으로 RPG룰북이 나온다고 들었는데... 과연 재미있을지.

    • 로키
      2009/02/25 18:14 PERMALINK EDIT/ERASE

      그거 과연 나오긴 나올지..(..) 페이트는 탄탄한 시스템이긴 한데, 지금까지 써본 바로는 생각만큼 재밌진 않았어.

  5. 2009/02/25 11:06 PERMALINK EDIT/ERASE REPLY

    http://www.yes24.com/Goods/FTGoodsView.aspx?goodsNo=2761719&CategoryNumber=001001017005002

    찾아보니까, 한국에서도 1권은 나왔네. 더 나올지 모르겠지만.

    • 로키
      2009/02/25 18:15 PERMALINK EDIT/ERASE

      감히 이몸의 예상을 깨고 나오다니! (버럭버럭) 나중 권수 출간은 이미 나온 거 판매량에 좌우되지 않으려나.

  6. 고냥마님
    2009/02/25 16:53 PERMALINK EDIT/ERASE REPLY

    오! 아래 사진의 인물이 마치...

    라이트닝볼트를 시전한것처럼 보인....(퍽퍽)

    • 로키
      2009/02/25 18:15 PERMALINK EDIT/ERASE

      뭘 시전한 건지야 상상 나름..ㅋㅋ 난 개인적으로 처음 사진에 나온 일러스트가 가장 마음에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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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부의 당당한 서신, 오일장 희망통신

2009/02/03 14:07  로키 TAG
몇 년 전, 유학 가기 전에 집에 있었던 때로 기억한다. 외할머니가 찾아오실 때 오일장에서 머리끈을 두어 개 사다 주셨다. 플라스틱 구슬을 고무줄로 꿴 머리끈을 보면서 요즘에도 장이 있구나 하고 신기해했던 생각이 난다. 장에서 이런 물건을 파는 아주머니--아마 아주머니였겠지--는 어떤 분일까 잠시 궁금했었다. 백화점이나 마트에서 물건 파는 점원과는 전혀 다른, 이익과 위험을 모두 스스로 진 철저한 자영업자. 그러면서도 자기 것이라고 부를 가게가 없는 노점상. 그 완전한 자율성과 주변적인 위치의 괴리가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안효숙의 수필집 '오일장 희망통신'은 바로 그런 장에서 물건을 파는, 본인 표현마따나 가난한 아줌마 이야기다. 1997년의 시린 겨울에 모든 것을 잃고, 엄청난 빚과 올망졸망 아들 하나 딸 하나 말고는 아무것도 없이 거리로 물건을 팔러 나선... 아무것도 보장이 없는 그 생활을 책을 통해 지켜보며 내가 다 조마조마했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데 아프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나, 장사가 안 되면 어떻게 하나. 그런 위태위태한 생활이 낯설면서도, 책에 간간이 나오는 갑천이나 한밭 도서관 같은 낯익은 곳을 볼 때마다 이건 먼 나라 얘기가 아니라 내 이웃, 내 주변 얘기였다. 중심이 아닌 주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주변부 이야기.

물론 슬픈 이야기가 많다. 여자 혼자서 아이들 키우며 노점상을 한다...는 소리만으로도 눈물샘은 벌써 전력 가동을 준비하는, 모성과 생활고와 가족애가 단칸방에 잠든 식구처럼 뒤얽힌 한국식 멜로드라마의 원류 아닌가. 게다가 작가의 필력은 강하고 진솔하고 생생해서, 까마득하도록 힘든 생활의 고통은 절절하도록 잘 전해진다. 그래서 바보처럼 글썽이며 시원한 감정적 카타르시스를 느낀 후, 책을 덮은 다음에는 아~ 참 불쌍하다 하면서 자신의 안전하고 안락한 생활로 얼마든지 돌아올 수 있다. 어려운 이웃의 이야기에 눈물까지 흘리는 자신의 인간미에 뿌듯해하며.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오일장 희망통신은 '나 불쌍하지?'를 외치는 단순한 최루성 드라마를 벗어나서 훨씬 당당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물론 고통도 있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절망도 있지만, 안효숙의 글은 고통의 전시를 넘어 깊고 폭넓은 삶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어려운 생활 와중에도 우스운 일화, 지독하게 노력한 끝에 조금씩 펴가는 생활의 즐거움, 속 썩이는 아이, 사랑을 하고 싶은 마음. 눈물과 웃음과 강인함과 연약함, 그리고 대체로 거기서 거기를 맴도는 삶이지만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다는 막연한 희망. 그게 오일장 희망통신에 드러나는 삶의 모습이며, 그건 우리 모두의 모습이기도 하기에 글은 눈물샘뿐만 아니라 마음을 끌어당긴다.

그래서 책에 나오는 주변부는 동정심을 유발하는 전시용 객체가 아니라 자신의 낮고 조용하면서도 강인한, 자신만의 목소리가 있는 주체이다. 어려운 상황에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꾸리고 책임지는 당당한 사람들의 삶과 이야기는 빛나는 중심을 위해 존재하는 그늘진 주변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그들의 주변이다. 조금만 돌아보면 볼 수 있고, 그다지 멀거나 낯설지도 않은. 어디가 중심이고 주변인지 누가 정하겠는가? 누구든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고, 주변 없이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데. 경계란 언제나 생각보다 유동적이고, 사람 사는 건 누구나 실은 비슷하다.

결국 오일장 희망통신은 어떤 불쌍하거나 먼 타인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어떤 사람의 어떤 삶에 대한 진실한 고백이다. 그리고 그 삶을 들여다보는 창이 동시에 자신의 삶을 비추보는 거울이 되는 멋진 기회이기도 하다. 모든 좋은 글이 그렇듯이. 가장 자신과 멀어 보이는 삶에서 그와 자신을 이어주는 보편성을 발견하는 것은 모든 인간을 이어주는 공통점인 인간성의 재발견이며, 세상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었던 경계를 허물어 자유로워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2009/02/03 14:07 2009/02/03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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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ainavi
    2009/02/03 15:45 PERMALINK EDIT/ERASE REPLY

    아 글쎄 빨리 논문쓰라니까 자꾸 이상한거 읽고, 뚝딱거리고, 만들고 도피하셔. -_-
    난 요새 당분간 일에 목숨거는 중. 매일야근. 혼자 불타올랐어.

  2. lhovamp
    2009/02/04 20:48 PERMALINK EDIT/ERASE REPLY

    결론적으로 논문을 안쓰고 계신 거였군요 [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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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인생의 이야기

2008/12/02 17:01  로키 TAG
승한군에게 빌린, 테드 창의 중편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 (Stories of Your Life and Others)'를 어제 읽었다. 기본적으로 생각 실험을 근간으로 한다고 생각하는 SF 장르의 특징을 아주 잘 보여준 작품집이 아닌가 싶다. 과학적 사고와 소설적 표현이 함께 어우러진 '생각 소설'의 재미는 SF에서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특히 '이해'와 '네 인생의 이야기' 등에서 드러난, 생각을 형성하고 표현하는 도구이기도 한 언어에 대한 심도있는 고찰을 보면 창의 작품을 SF를 넘어 메타SF라고 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한편 작품을 쓰느라 언어학 책만 수십 권 읽었다는 얘기를 보면 왜 창이 다작하는 작가가 될 수 없는지 납득이 가면서도 그 장인 정신이 정말이지 존경스럽다.

SF가 빠지기 쉬운 함정 중 하나라면 사유 실험에 편중한 나머지 소설적 표현을 놓치는 것이다. 마이클 크라이턴이나 아이작 아시모프의 작품이 매니아에게 재미있기는 하지만 플롯 중심적이고 인물의 내면 표현이 부족해서 문학적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 그 예일 것이다. 반면 테드 창의 작품들은 과학적 사고의 기반이 철저하면서도 인물의 감정이나 관계 표현에 상당히 충실한 점이 돋보인다. 뉴 웨이브의 영향이 어쩌고 할 것도 없이 그의 작품은 SF와 주류 문학의 경계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경계를 모든 작품에 대해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문학적 가치만을 따질 수 있고 장르 내적 맥락과 기준으로만 가치가 있는 책들도 분명히 많이 있으니까. 고전 추리소설의 퍼즐적 정형성, 로맨스의 흔한 전개, 판타지 검과 마법물의 천편일률적 줄거리, 그리고 공상과학의 줄거리 중심성 등을 문학의 심미적 가치와는 별개의 효용이 있는 장치로 본다면 이들 작품을 무조건 주류 문학의 잣대로 재는 것은 무의미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테드 창의 작품은 그런 구분 없이 소위 주류의 기준으로 평가해도 독자적 가치를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인상깊은 작품집 중에도 '네 인생의 이야기'가 제일 인상깊었다. 외계인과의 첫 접촉이라는 흔한 소재를 사용해 언어, 시간 관념, 그리고 사람이 생을 '경험'하는 방법이라는 소재를 다루면서도 끝에 찡한 감동과 생각할 거리를 남기는 글에서 테드 창은 장르의 정형성을 알고, 이해하고, 비틀어서 장르의 본질을 표현하면서도 소설이라는 매체의 미적 가치를 놓치지 않는 솜씨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교하게 펼치고 있다.

이렇듯 존재의 조건 자체에 도전하는 사유 실험에--수학에 근본적인 모순이 있다면? 시간을 순차적인 아닌 동시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면?--차가운 지적 거리를 두지 않고 인간적 공감을 통해--끝나가는 결혼생활의 조용한 절박감,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절절한 슴픔--바로 '나'의 이야기로 느끼게 하고, 그럼으로써 삶 자체를 새로운 시선으로 보게 하는 것은 사유 실험과 소설을 결합한 SF가 선사할 수 있는 재미의 극치이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에 SF를 통해 엿보는 새로운 가능성들의 희열과 두려움은 나와 당신,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2008/12/02 17:01 2008/12/02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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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2/03 10:09 PERMALINK EDIT/ERASE REPLY

    올해 초에 드디어 하나 더 쓰셨는데.. 왠지 당연한 듯 휴고상이랑 네뷸러상을 다 받아버려서 '상받는 게 제일 쉬웠어요.'라는 말이 마음에 와닿아버렸다죠.

    최신 SF 작가군 중에서는 단연 독보적이라 생각합니다. 테드 창 만세!! -_-b

    • 로키
      2008/12/03 16:40 PERMALINK EDIT/ERASE

      정말 대단한 작가죠. 꼭 글쓰기에 생계를 의지하고 풀타임으로 뛰어야 뛰어난 작가는 아니라는 산 증거인 듯도!

  2. 2008/12/03 14:55 PERMALINK EDIT/ERASE REPLY

    안타깝게도, 난 그 사유 실험의 상당 부분을 이해하지 못했어; 좀 더 읽어보고 맛을 되새겨야 할 것 같아.

    그래도 지금까지 이해한 부분만으로도 충분히 가치있는 독서였음.

    • 로키
      2008/12/03 16:41 PERMALINK EDIT/ERASE

      내일 돌려줄게. :) 이 책에 대해서는 승한군하고도 좀 더 얘기해보고 싶어.

  3. lainavi
    2008/12/11 09:54 PERMALINK EDIT/ERASE REPLY

    헉. 자꾸 읽고 싶은 책을 늘리지 말아줘

    • 로키
      2008/12/11 16:24 PERMALINK EDIT/ERASE

      뭐 네가 소설 읽는 데 얼마나 걸린다고..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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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은 정치적이다 (테헤란에서 롤리타를 읽다)

2008/03/24 23:50  로키 TAG ,
최근 재미있게 읽은 책이라면 이란인 영문학 교수이며 작가인 아자르 나피시 (Azar Nafisi)의 '테헤란에서 롤리타를 읽다 (Reading Lolita in Tehran)'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미국에서 공부하다 이란에 귀국한 필자가 이란 혁명과 이라크 전쟁을 거치며 많은 억압을 겪다 결국 대학을 때려치우고 가장 가까운 학생들과 목요일마다 집에서 영문학 토론 강의를 열었던 얘기. 나보코브의 롤리타, 오스텐의 오만과 편견, 피츠제랄드의 위대한 개츠비 등, 부도덕하다고 혁명 정권이 금지한 책들을 읽고 토론하고 고민하는 이들 여성의 모습은 문학과 삶, 그리고 정치와 개인에 대한 감각적인 통찰이다.

책에서 나피시가 하는 얘기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상상력의 정치성이다. 이란 혁명은, 그리고 그에 대한 저항은 현실의 싸움일 뿐 아니라 상상의 싸움이기도 하다고 그녀는 말한다. 책 첫머리에서 그녀는 다시 이란을 떠나며 학생들과 찍은 두 장의 사진을 언급한다. 첫 번째 사진의, 법적으로 강제당한 베일과 로브를 똑같이 두른 그들은 이란 혁명 정부가 상상하는 고분고분한 이슬람 여성. 자신이 아닌 타인의 상상의 일부가 된 모습이다. 두 번째 사진에서, 집안이니까 로브를 벗고 그 밑에 청바지, 치마 등 스스로 고른 옷을 드러낸 그들은 제각기 개성대로 구분할 수 있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다. 그것이 그들이 상상하는 자신들의 모습이다. 서로 다른 취향과, 꿈과, 믿음이 있는 개체로서.

개인적 상상력과 개인적 표현은 모든 억압적인 정권에 위험하다. 그래서 혁명 정부는 언론과 집회뿐 아니라 복장을, 문학을, 예술을 규제하며 이란 국민의 공적, 사적 생활에 깊이 파고들었다. 그들 국민이 자신들의 상상, 자신들의 이야기를 할 수 없도록. 그들의 이야기와 상상과 꿈조차 지배하고자. 독재 정권의 수법이란 다 비슷한 모양이다. 이란이나 우리나라의 군부 정권은 사실 좀 촌스러운 옛날식 독재에 속하고, 요즘의 신자유주의 세계에는 직접적인 억압 대신 극도의 상업성과 개인주의, 정치적 무관심을 유도해서 소수의 통치로 가는 방향인 것 같지만, 어느 쪽이든--통제이든, 매체의 홍수이든--상상력을 지배하지 않고는 진정 지배할 수 없다.

열두 살 롤리타를 차지한 험버트 험버트는 행동의 자유만을 제약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이야기 자체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험버트가 롤리타라는 이름을 붙인 아이의 관점을 독자는 영영 알 수 없다. 오직 험버트의 시선을 통해, 험버트가 10대의 돌로레스를 부수고 자기 뜻대로 만들어낸 롤리타만을 볼 수 있으니까. 롤리타는 자신의 이야기조차 끝내 할 수 없이 험버트의 상상의 일부가 되었고, 그것은 육체의 죽음과는 또 다른 기억의 죽음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남기지 못한다면 무엇이 남는가? 상상이 죽으면 육체의 죽음 후에 뭐가 있는가?

험버트가 악당인 근본적인 이유는 호기심의 결여라고 나피시와 학생들은 결론을 내린다. 그는 타인에 대해, 심지어 끝없는 집착과 번뇌의 대상이었던 롤리타에 대해서도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생각하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오직 자신의 욕망과 자신의 만족. 그래서 롤리타를 포함해 다른 사람이란 그에게 진정한 개체가 아니라 수단이나 방해물이나 지나가는 인상일 뿐이다. 당신은 무엇을 원하느냐고, 어떤 사람이며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꿈꾸느냐고 묻지 않고 그를 위할 수는 없다. 상대의 의지를 상관하지 않으면 섹스가 강간이 되듯.

호기심의 결여가 악이라면 그에 대한 처방은 대화이겠지. 그런 면에서 나피시가 얘기하는 소설의 근본적 민주성은 더욱 흥미롭다. 오스텐의 '오만과 편견'에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목소리들, 대화와 수다와 편지의 시끄러움 속에서 독자는 인물들의 입장을, 그들의 두려움을, 희망을, 관점을 들을 수 있다. 그래서 잘 쓴 소설은 가르침이나 설교가 아닌 이해와 경험이다. 탐욕의 함정에 대한 소리높은 웅변이 아닌, 부두 끝의 녹색 빛을 향해 달려가는 소년의 꿈이 '위대한 개츠비'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와 상상에 들어가본 독자는 또 각자 자신의 목소리를 더하며 새로운 의미의 화음이나 불협화음을 만들어간다.

그 수많은 목소리의 불협화음 대신 대신 단일하고 강한 목소리를, 거대한 화합의 합창을 바라는 것도 물론 자연스럽다. 그러나 마키아벨리가 티투스 리비우스를 논하며 지적했듯 (1권 4장 (영문)) 정쟁은 좋은 정치적 결정의 기반이며, 폭력으로 폭발할 수 있는 이해 충돌의 압력을 완화하는 압력 밸브이기도 하다. 모두가 자기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눈 먼 채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 그 결정에 영향을 받는 사람과 집단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이 필요한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침묵을 강요한 정치적 결정 과정은 고의적으로 눈을 감고 달려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극우에서는 종종 반대하고 논쟁하며 드높인 목소리를 한가로운 이기주의로 치부하지만 (그러면서 자신들의 반대와 논쟁에는 묘하게 관대하지), 대화와 논쟁은 민주주의뿐 아니라 삶과 존재의 근본이다.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나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나의 상상은 묻히고, 나의 존재는 잊혀져 죽음보다 더 깊은 죽음이 될 테니. 나의 염원이, 나의 이익이 드러날 장이 봉쇄당한다면 남는 선택은 굴종 아니면 폭력이다. 그리고 굴종 속에는 언제나 폭력의 씨앗이 독초의 뿌리를 내리고 있다.

모든 종류의 근본주의가 상상력을 지배하려고 드는 이유는 상상력의 위험성 때문이다. 상상은 개인적이며, 개인주의적이며, 불온하다. 법과 폭력으로 강요당하는 베일과 로브 밑에 입은 각양각색의 청바지와 치마와 티셔츠와 블라우스처럼, 상상의 영역 속에서 사람은 무엄하게도 독재자의 꿈이 아닌 자신만의 꿈을 꾼다. 자유롭게 내는 목소리를 통해 이 상상은 공적 영역으로 터져나오며, 사회는 통제할 수 없어져버린다. 결국 근본주의의 진짜 적은 내가 나이며, 당신이 당신이라는 사실 그 자체. 우리들이 제각기 하는 상상과 꾸는 꿈은, 우리가 내는 목소리의 시끄러운 불협화음은 그래서 민주적이며, 또한 정치적이다.
2008/03/24 23:50 2008/03/24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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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삶을 위하여

2008/03/03 05:53  로키 TAG ,
요즘에는 최근 읽은 책 때문에 사랑이라는 화두에 대해 부쩍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정신과 의사 스캇 펙 (M. Scott Peck)의 The Road Less Traveled인데, 정신 건강과 영적 성장을 다룬 이 책은 특히 영적 성장에서 사랑의 역할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사랑은 흔히 말하는 연애 감정이나 다른 어떤 감정도 아니다. 펙이 정의하는 사랑은 대상의 영적 성장을 위해 노력을 기울이려는 의지이다. 즉, 이 정의에 따르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의 영적  성장을 위해 모든 노력을 하는 의지를 말하고, 배우자나 자식, 친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마찬가지로 그 사람이 더 높은 영적 단계로 나아갈 수 있게 희생과 어려움이 따르더라도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사람이 느끼는 감정 중에는 사랑과 흔히 혼동하는 것이 너무나 많다. 예를 들어 '너 없이 못 살아' 하는 의존성이나 애착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이므로 사랑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대상의 독립성을 저해하는 과보호 역시 상대의 성장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만족이므로 사랑이라고 할 수 없다.

흔히 사랑이라고 부르는 연애감정은 어떨까? 연애를 할 때 자아의 경계가 함몰하는 환희 역시 사랑과 관련은 있지만 사랑 그 자체는 아니라고 펙은 말한다. 이러한 감정은 결혼과 육아라는 힘겨운 과정을 견뎌낼 동기부여를 하는 뇌화학적 속임수이며 (이른바 낚시..(..)), 오히려 이런 매혹이 희미해지는 때야말로 진정한 사랑의 시작이 될 수 있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그나마 저자가 말하는 진짜 사랑을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은 가족 내에서이다. 서로 이해하고 보듬어주면서도 자신과 상대의 개체성을 인정하는 부부, 그리고 자식에 대한 내리사랑. 불행히도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도 거의 항상 사랑은 사랑 아닌 것--의존성, 허영, 과보호, 분노, 두려움 등--과 쉽게 섞여서 자식에게 알게모르게 평생 가는 상처를 남기고, 그 자식은 또 부모가 되어 역시 정신적 문제를 마치 유전병처럼 물려준다.

사랑은 놀라운 것이지만 절대 쉽지는 않다. 그래서 아주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 등 극소수의 사람 외에는 진정 사랑하기란 어렵고, 단 한 사람도 진정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도 수두룩하다. 그래서 내가 하는 생각인데, 세상에 대해 우리가 베풀 수 있는 최소한은 '소극적 사랑'이 아닌가 싶다. 마주치는 모든 사람의 영적 성장을 위해 자신을 바칠 수 없다면 최소한 그들의 영적 성장을 저해하지는 않겠다는 의지. 그만큼만 할 수 있어도 꽤 괜찮게 살아가는 삶이 아닌가 싶다.

사랑은 정말로 흔하고 쉽게 쓰는 말이지만, 진정한 사랑은 흔하지 않다. 어떻게 하면 사랑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나는 정말로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요즘 많이 든다. 그게 별로 종교적인 인간이 아닌 내 나름의 영성일지도 모르지. (재밌게도 펙은 기독교인이지만 영성과 종교를 동일시하지 않으며, 종교를 전보다 덜 믿는데도 지금 세대는 이전 세대보다 영적이라고 말한다. 그들이 등을 돌린 건 영적 성장이 아니라 미신과 권위주의라고 말이지. 생각하는 게 마음에 드는 아저씨라니까.)
2008/03/03 05:53 2008/03/03 0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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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MrGloom
    2008/03/03 19:12 PERMALINK EDIT/ERASE REPLY

    마음에 드는책이군요 -_-b

    • 2008/03/04 12:27 PERMALINK EDIT/ERASE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지도요. 제가 대충 떠오르는 대로 얘기한 것보다 좋은 얘기들이 많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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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악의 얼굴을 보았다 - '권위주의자들'

2007/09/21 04:48  로키 TAG ,
The Authoritarians (권위주의자들)는 한국에서 미국으로 건너오는 길에 흥미롭게 읽은 PDF 책이다. 수십 년 동안 권위주의적 성격을 연구한 마니토바 대학 심리학 교수 밥 알트마이어가 그의 연구를 심리학 전공이 아닌 사람도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한 책으로, 권위주의적 성향이 강한 사람들의 심리와 그들을 대상으로 한 심리 실험 결과, 그리고 어째서 이러한 사람들이 민주주의에 위협이 되는지 등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심리학 연구를 내용으로 하고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정치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내용이고, 실제로 저자도 책 끝머리에서 권위주의의 위협에 대한 대응책을 제안하고 있다.

권위주의자란 무엇인가? 크게 권위주의적 추종자와 권위주의적 지도자가 있는데, 전통적으로 심리학 연구는 권위주의적 추종자에게 초점을 두고 있다. 권력을 바라는 사람이야 언제든 있게 마련이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권위주의적 추종자의 존재이니 말이다.

권위주의적 추종자는 크게 세 가지 특징으로 알아볼 수 있다. 첫째, 사회적 권위에 대한 강한 종속 성향이 있다. 사회적 권위란 국가, 종교, 부모, 교회 등 사회적으로 용인된 권력을 가리킨다. 둘째, 그 권위에 용인받거나 명령받으면 강한 공격 성향을 보인다. 이 공격 성향은 폭탄 테러처럼 물리적일 수도 있고, 매국노라고 매도하는 것처럼 감정적이고 사회적일 수도 있다. 셋째, 사회의 평균이나 전통에 맞추려는 획일화 성향이 강하며, 이 사회적 평균을 도덕적 기준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소수 권리에 대해서는 별로 호의적이지 않다.

권위주의적 성향을 측정하는 도구로는 간단한 테스트가 있다. (계산하기 쉽게 PHP 로 만든 것이고, 귀찮아서 번역은 안했다.) 나올 수 있는 가장 낮은 점수는 20이고, 가장 높은 점수는 180이다. 뭐 점수가 몇 점이면 당신은 어떤 사람이다 같은 건 없고, 점수에 따라 얼마나 행동을 통계적으로 예측할 수 있나 보는 용도이다. 권위주의적 성향이 높다고 할 때는 저 테스트에서 점수가 높게 나왔다는 의미로 보면 된다.

권위주의 점수가 높은 권위주의적 추종자에 대한 수십 년에 걸친 연구와 심리 실험 결과에 따르면 이들은 기본적으로 세상은 말도 못하게 위험하고 금방이라도 사회의 안정된 구조가 무너질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새로운 방식과 변화에 위험을 느끼며, 그들을 안전하게 지켜줄 권위에 의존한다. 그러니 새로운 생각이나 사람을 두려워하며, 대화와 협력보다는 적대감이 자연스럽게 다가올 수밖에. (요다옹이 두려움을 가리켜 다크포스의 근원이라고 한 것도 괜한 말은 아닌 모양이다.)

권위주의자들은 비판적 사고 능력도 부족해서, 권위주의 성향이 낮은 사람에 비해 상호 모순되는 명제에서 모순을 발견하지 못하며 (예를 들어 '헌법을 수호해야 한다'와 '공립학교에서 특정 종교의 교리를 가르쳐야 한다'에 둘 다 동의한다든지), 원칙과 규범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위선 성향이 강하다 (예를 들어 '공립학교에서 기독교 교리를 가르쳐야 한다'에는 동의하고 '공립학교에서 불교 교리를 가르쳐야 한다'에는 반대).

또한, 권위주의적 성향이 강한 사람은 자기에게 듣기 좋은 얘기를 하는 사람은 진심이라고 믿어버리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예를 들어 한 실험에서는 동성애를 부정적으로 보는 글을 보여주고, 이 글을 쓴 사람은 동성애를 부정적으로 보는 글을 쓰라는 과제를 받았다고 알려주었다. 놀랍게도 권위주의적 성향이 강할수록 그 글이 이 학생의 진짜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고 믿는 경향이 강했다.

이쯤 되면 부도덕한 정치인이 권위주의적 추종자를  이용하기가 얼마나 쉬운지 쉽게 알 수 있다. 듣기 좋은 소리만 해주면 자기편이라고 굳게 믿을 테고, 실제 행동은 말하는 것과 아무리 모순이 많아도 그 모순과 불의는 적당히 합리화할 테니까. 게다가 그 정치인을 사회적 권위로 인정하면 (교회에서 그에게 투표하라고 한다든지) 그를 비판하는 모든 목소리를 맹목적으로 공격할 테니 이 얼마나 편리한가.

반면 권위주의적 성향이 낮은 사람은 높은 사람에 비해 비판적 사고 능력이 강해서, 자신이 지지하는 주장이든 반대하는 주장이든 같은 원칙을 적용하는 일관된 사고를 보인다. 또한, 권위주의 성향이 높은 사람보다 모순을 쉽게 발견하고, 새로운 사실과 논리에 맞추어 자신의 주장을 수정하는 경향이 더 강하다. 이들은 자신과 같은 의견을 표시한다고 해도 쉽게 진심이라고 믿지 않는다. 즉 권위주의 성향이 낮은 것들(..)은 '우리 편'이 아닌 '원칙'을 따를 가능성이 크므로 정치인이 이들의 지지를 얻으려면 듣고 싶은 얘기를 해주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실제 원칙을 따르는 골치 아픈 짓을 해야 할 것이다.

권위주의적 성향에 대해 이해하고 나면 정치와 일상생활에서 이러한 성향이 작용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게 된다. (물론 망치를 든 사람에게는 모든 문제가 못으로 보이는 경향은 경계해야겠지만, 권위주의적 성향이 행동에 대한 강력한 통계적 예측력이 있다는 것이 일관된 연구결과이다.) 여신도를 강간한 목사를 피해자가 고소하려고 하니까 신도들이 벌떼처럼 들고일어나 피해자의 피를 말린다든지, 기만을 빌미로 시작한 전쟁을 무조건 지지하고 반전주의자는 모두 매국노로 몰아버린다든지.

한 마디로 자신이 따르는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권위는 무슨 악행을 저질러도 부인하거나 정당화하고, 이 권위에 반대하거나 이 권위가 적대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주장의 근거나 옳고 그름과 무관하게 맹목적 적대감을 보이며 인격적으로 모독하고 공격하는 사람들이 바로 권위주의적 추종자들이다. 이러한 사람들을 얼마나 기만하고 이용하기 쉬운지, 그리고 이런 사람들을 이용해서 얼마나 악몽 같은 사회를 만들 수 있는지 하는 예는 전에도 많이 보아왔고 지금도 많이 볼 수 있다.

권위주의적 추종자를 논하기는 했지만 같은 사람의 권위주의적 성향도 나이와 경험에 따라, 또 사회적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국가적 위기가 닥치면 사회적으로 불안이 고조되면서 단체적으로 권위주의 성향이 상승하는 효과를 관찰할 수 있다.

이 책을 읽고 하나 느낀 점이라면 권위주의적 추종자에게 분노하거나 논리적으로 설득하려는 것은 큰 소용이 없다는 점이다. 권위주의적 성향이 높은 사람과는 거의 이성적인 대화를 할 수가 없으니까. 모순과 위선을 알아채지 못하는 그들의 인식체계에는 먹히지도 않고, 비생산적인 적대감만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크다. 그들은 합리성이나 이성을 근거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 복잡하고 위협적인 세상이 두려워 견딜 수가 없어서 강한 권위에 맹종하는 것이니 말이다.

정말로 권위주의에 대응하는 법은 사람을 두려움으로 조종하려는 권력의 수법에 대항해서 권위주의적 추종자의 생성을 막는 것, 그리고 권위주의적 추종자의 강력한 단합력과 조직력, 높은 투표율에 대항해서 역시 단합하고, 조직하고, 투표하는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세계가 나의 세계가 될 수 없도록. 그들이 갈구하는 위안인 권위의 억압이 나를 지배할 수 없도록. 개별적으로는 좀 위선적이긴 해도 크게 악하지 않지만 부도덕한 권위의 용인을 받으면 어떤 끔찍한 짓도 할 수 있는 악의 얼굴--권위주의자들의 세상이 오는 것을 막을 수 있게.
2007/09/21 04:48 2007/09/21 0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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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09/09/14 16:20 PERMALINK EDIT/ERASE REPLY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 로키
      2010/02/06 17:02 PERMALINK EDIT/ERASE

      이런.. 어쩌다 댓글이 달린 것도 모르고 지나갔네요. 이후 어떻게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출처만 밝히시면 인용은 자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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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 르완다, 그리고 아프리카

2007/05/31 20:34  로키 TAG ,
필립 고레비치의 1998년 작, '우리는 내일 가족과 함께 살해당한다는 사실을 알려드립니다. (We Wish to Inform You that Tomorrow We Will be Killed with Our Families)'라는 긴 제목의 책을 방금 다 읽었다. 논문 써야 하는데 이게 뭐 하는 짓..(..) 어쨌든 원래는 2006년 가을에 들은 국제형법 강의 지정 도서였는데, 당시에는 귀찮아서 (퍽) 안 보다가 2007년 봄 학기가 끝나갈 무렵, 영화 호텔 르완다를 보고  다시 잡은 책이다. 호텔 르완다의 배경이 된 실화의 주인공 폴 루세사바기나도 책에 나온 많은 르완다인 중 하나.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일단 책이 재밌다. 흥미 본위의 자극적인 책도 아니고, 1994년의 잔혹했던 석 달 얘기로 350쪽 분량을 채운 것도 아니다. 고레비치는 1994년의 민족 청소를 서구에서 흔히 생각하는 '구제불능 아프리카인들의 부족적 분쟁'으로 치부하는 대신 그 뒤에 있는 역사적, 정치적 배경을 끈기있게 추적하는 데서 시작한다. 권력이란 자신의 진실을 타인이 공유하게 하는 것이라는 일관된 주제의식과 함께.

불의와 불평등도 있었지만 민족의식보다는 르완다인이라는 국가 의식이 훨씬 강했던 후투와 투치 두 집단을 벨기에가 식민 통치 중 인위적으로 분할한 역사는 상대 집단을 억누르거나 말살하는 것만이 살길이라는 강박 의식을 낳았다. 프랑스는 아프리카에서 패권을 유지하려는 의도로 투치에 대해 50여 년간 차별과 주기적인 학살 정책을 펼친 후투 주도의 독재 정부를 지원했고, 우간다 등지로 망명한 투치를 주축으로 한 군대인 RPF가 르완다로 쳐들어왔을 때 르완다 정부군은 프랑스군의 지원으로 이들을 손쉽게 물리쳤다.

그러면서도 르완다 독재 정권은 반대 세력을 침묵시키고 권력을 절대화하기 위해 RPF의 위협을 크게 부풀렸고, 이를 빌미로 모든 투치를 RPF 협력자로 몰아 1994년 봄의 학살을 시작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야만인들의 부족적 증오가 아닌 철저한 계산과 전국적인 조직, 세련된 선동 작전을 동원한 지극히 '현대적인' 학살을.

분명히 말하지만 모든 것이 서구를 비롯한 국제 사회의 잘못은 아니다. 인간이 다 그렇듯 아프리카인들 역시 권력과 이익을 위해 서로 괴롭히고 죽인다. 1994년 르완다 학살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수 세기에 걸쳐 아프리카의 상황을 왜곡하고 망가뜨린 요인 중 국제 사회의 패권주의적 야욕이 있는 것은 틀림없다. 그리고 이들 나라가 스스로 서명한 조약을 깨고 민족 청소를 수수방관한 것도.

소말리아 개입의 뒤끝에 허우적대던 클린턴 정권은 미국이 나서기를 거부한 정도가 아니라 다른 국가들의 개입까지 열심히 저지했다. UN 지도부에서는 평화유지군이 학살자들의 무장 해제나 학살을 부추기는 라디오 방송국의 폭격을 허락해달라는 요청을 딱 잘라 거절했다. 민족 말살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조차 열심히 부인하며 국제 사회는 한 달, 또 한 달을 허송세월했다. 르완다에서는 하루에도 수백씩 사람이 죽어가던 동안.

결국 학살을 막은 것은 서구의 '문명인'들이 아니라 아프리카 '야만인'들 자신이었다. 놀랍도록 군율이 엄격하다고 많은 사람이 감탄했고 전술적으로도 세련된 조직이었던 RPF는 지속적인 공격으로 르완다 정부군을 압박했고, 많은 정부 측 포로를 잡은 후에는 이들을 보복 사살하겠다는 위협으로 학살의 속도를 늦추었다. 그리고 마침내 RPF가 르완다를 장악하자 후투 파워를 부르짖던 정부군은 르완다 후투 인구를 1/3 가까이 인간 방패로 끌고 국경을 넘어 도망쳤다.

그리고 RPF가 장악한 르완다에서 후투에 대한 보복 학살은 기절초풍하게도 없었다. 보복과 범죄가 없었다는 얘기는 전혀 아니지만,  RPF를 주축으로 수립한 새 르완다 정부의 정책은 후투의 말살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구 정권하에서 투치와 함께 표적이 되었던 후투 반체제 인사들 역시 새 정부에 합세했고, 여전히 문제는 말도 못하게 산재했지만 르완다는 일단 석 달간의 지옥을 간신히 면하고 안정화 과정을 시작할 수 있었다.

국외, 특히 당시 자이르에 후투 파워 세력과 백만여 명의 후투 인구가 몰려들면서 르완다를 둘러싼 어처구니 없는 희비극이 제 2막을 올린다. 지난 석 달 동안 르완다를 외면하던 국제 사회는 민족 대학살을 자행하다가 도망친 망명 정부가 중심이 된 '난민' 집단에 대해 법석을 떨면서 이들 난민 캠프에 엄청난 지원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실은 난민도 아니었던 것이, 국제법상 난민이란 자국으로 돌아가면 박해받을 사람들을 가리킨다. 개인적인 보복 살해와 신 정부군의 범죄는 있었지만 르완다 신 정부가  구 정부처럼 정책적으로 민족 말살을 지원한다는 증거는 없었다. 또한, 비정치적인 형사 책임을 면하려고 도피한 경우도 난민이 아니다.)

황당한 건 둘째치고, 후투 파워 망명 정권은 이들 난민 캠프를 중심으로, 국제 사회의 지원을 받으며 신 르완다 정부 전복과 민족 말살의 재개를 위한 권력 기반을 다졌다. 이들이 자이르 독재자 모부투의 지원을 받으며 자이르 시민인 투치 인구를 학살하고 몰아내는 동안 국제 사회는 하루에 백만 불씩을 쓰며 이들 캠프를 유지했다. (이 중 70%가 국제 조직들의 주머니로 들어간 것을 보면 국제 지원이 얼마나 큰 사업인지 새삼 실감하게 된다.) 이들 난민 캠프를 기반으로 후투 파워 세력이 르완다를 침략할 것을 우려한 르완다 정부에서 아무리 캠프들의 폐쇄와 자국 시민의 귀환을 요구해도 UN에서는 시간만 끌 뿐 대응이 없었다.

또다시 지지부진하고 위험한 상황의 주도권을 잡은 것은 아프리카인들 자신이었다. 서유럽 전체만큼 넓은 나라인 자이르를 로랑 카빌라의 반군 세력과 자이르 내 투치 반군, 우간다, 남아공, 탄자니아, 짐바브웨 등 10여 아프리카 국가의 정부군, 그리고 (르완다에서는 당시에 부인했지만) 르완다 정부군이 침략해 모부투를 실각시킨 것이다. 모부투는 도주했고, 자이르는 콩고 민주 공화국이 되었다. 저자의 말대로 아프리카가 아닌 유럽이었다면 세계 대전이라고 했을 사건이다.

국제 조직들이 바삐 철수하는 동안 르완다 군대는 자이르 내 난민 캠프들을 비교적 질서 정연하게 해체했고, 르완다인들은 르완다로 자발적으로 귀환했다. 1994년 학살과 관련한 체포도 있었지만 그 비율은 예상보다 낮았고, 대체로 재정착은 평화로웠다.

결국 자국을 위협하는 문제에 대해 국제 사회가 협조를 거부하거나 심지어는 방해해도 르완다 정부는 주변국의 협조로 치밀한 외교적, 군사적 수단을 동원해 해결했던 것이다. 타국의 정권을 교체하면서까지... '아프리카 국가들이 잘 조직한다면 유럽도 미국도, 불안정을 일으키긴 하되 아프리카를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할 것이다.'라는 폴 카가메의 말을 믿어도 될까. 중앙아프리카가 변화의 태동을 시작했다고, 안정과 번영을 위한 첫 걸음을 내디뎠다고 생각해도 될까. 그렇게 믿고 싶다, 정말로.

물론 아직도 문제와 불의는 계속된다. 후투 파워 잔당의 테러, 르완다 신정권의 부패, 쉽게 가시지 않는 1994년의 엄청난 정신적 외상, 또 조금 눈을 들어 보면 다르푸르의 끔찍한 학살과 인권 유린까지... 쉽고 빠른 해결은 어디에도 없다. 이건 비단 아프리카만 그런 게 아니라, 안정된 사회를 성립하는 과정은 어디서든 너무나 힘들다. 그래도 계속해서 나아간다면 발전이란 가능하다고 믿는다. 아프리카연합과 산하 인권재판소의 설립 같은 움직임을 봐도 말이다.

책 끝에 나온 가슴 쓰리고 가슴 뭉클한 이야기로 긴 글을 접는다. 1997년, 구 정부 잔당이 르완다 북서쪽의 키부예와 기센이에서 학교를 급습했다. 이들은 투치 학생들을 죽이려고 10대 여학생들을 끌고 나와 후투와 투치로 나누어 서라고 명령했다. (신정권하에서는 후투와 투치를 구분하는 신분증이 없어졌다.) 양쪽 학교에서 모두 소녀들은 갈라서기 거부했다. 우리는 모두 르완다인일 뿐이라며. 결국 그들은 구분없이 구타와 총격을 당했고, 키부예에서 열여섯, 기센이에서 열일곱 명이 살해당했다.

이미 너무 많은 이가 죽어간 르완다에 더 이상의 순교자는 필요하지도 않고 있어서도 안 되지만, 그런 얘기를 들을 때면 조금은 희망이라는 것을 품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르완다에 대해, 아프리카에 대해, 그리고 슬프고 추악하고 때로는 놀라운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2007/05/31 20:34 2007/05/31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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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들의 신 (The God of Small Things)

2006/08/04 10:18  로키 TAG
The God of Small Things

작은 것들의 신



(나름대로 독후감...스포일러 있음)

2006/08/04 10:18 2006/08/04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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