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글에 쓰고 있다가 별 상관없는 얘기인 것 같아서 별문으로 뺐다.
동성애와 취향 얘기가 나온 김에 동성애에 대한 내 '취향'을 묻는다면, 나는 일단 무슨 목적의 취향이느냐고 묻겠다.
내가 동성애를 할 의향이 있느냐는 의미냐면, 현재 이성과 사귀고 있으며 바람을 피울 생각은 없다. 그런 면에서는 취향이 아니겠지.
(남친이 성전환수술을 해도 계속 연인일지는 그때 가서 생각하겠다. 그에게는 성전환수술이 필요없으므로 추천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 지면을 빌어 전한다.)
다른 사람이 동성애를 하는 것에 대한 생각을 묻는 것이라면, 그건 남의 이성애에 대한 생각을 묻는 것만큼이나 묘한 질문이다.
옆집에서 (혹은 옆 도시에서, 혹은 지구 반대편에서) 이성이든 동성이든 혼자든 여럿이든 자기들끼리 뭘 하든 내 취향과는 무관한 게 뻔하잖아.
아니, 오히려 별로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 남의 성생활에 대해 왜 취향이 존재하는 걸까, 그게 더 궁금하다.
동성애자와 친구가 될 수 있는지 하는 의미의 취향이라면 당연히 친구가 될 수 있다.
아는 사람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알아서 더 가까워지기도 했다. 이전에는 못했던 연애 고민 얘기도 듣고 했으니까.
BL물이나 야오이에 대한 취향이라면, 특별히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 그냥 별 관심이 없다.
하지만 어차피 그건 동성애에 대한 취향이 아니라 매체에 대한 취향 아닌가.
이렇게 여러모로 '남의' 동성애에 대한 취향이라는 건 참 성립하기 어렵다.
그냥 각자 자기 생활이나 잘 챙기면 안 될까. 관음증이 아닌 이상 남의 성생활에 대한 취미라는 건 그 자체가 모순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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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흑인이 싫어: 취향 아닌 취향에 대하여
TAG 동성애, 시사, 인권뭐랄까, 사람이 피부가 검다는 것 자체가 뭔가 이상하잖아? 더러워 보이고.
게다가 미국에서든 아프리카에서든, 왜 그렇게 못 살고 서로 싸워대?
흑인이라고 무슨 차별을 당해야 한다거나 해악을 끼쳐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고,
그냥 흑인하고 알고 지내거나 사귀고 싶지 않을 뿐이다.
취향이니까 존중해 줘야지. 흑인인 게 무슨 감투냐?
언제나 키보드 워리어의 낙원인 이글루스에서 게이혐오 관련 글을 보면서 든 생각이다.
누군가 흑인에 대해, 아시아인에, 여자에 대해 저렇게 '취향'의 문제로 쓴다면 어떨까.
솔직히 제목하고 첫 다섯 줄 쓰면서 스스로 혐오감에 손이 떨렸지만...
분명 세상에 게이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듯이, 흑인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는 건 사실이다.
이런 건 모두 취향으로 존중받아야 할까?
어떻게 타고난 피부색으로 사람을 싫어할 수 있느냐고?
동성에게 성적으로 끌리는 것도 유전적이라는 증거가 있는 판에 왜 안 되겠는가.
게다가 무슨 해를 끼치자는 것도 아닌데, 그저 싫다는 것일 뿐이라면.
뭔가 이상하다고? 어째서 이상할까.
사실 이건 취향이 아니라는 데에 진짜 문제가 있다.
빨강보다 파랑이 좋은 건 취향이다. 소녀시대보다 원더걸즈가 좋은 것도 취향이다.
그러나 어떤 계층의 사람을 선험적으로 싫어하는 건 십중팔구 취향이 아니다.
겪어보고 좋아할 수도, 싫어할 수도 있는 개인이 아닌 소속 집단의 문제라는 점에서 이미 정치적, 사회적 사안이다.
L이라는 사람이 우리 애를 가르치는 선생인데, 알고 보니 L은 동성애자였다고 하자.
L의 선생님으로서의 자질이나 실력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다.
동성이든 이성이든 L이 학생이나 기타 미성년자에게 성적 관심을 보인 잃은 없다고 하자.
동성애자를 싫어하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1. 당장 L을 해임해야 한다고 학교에 압력을 넣거나, 그런 활동을 심적으로 지지할 것인가?
그렇다면 당신은 동성애 차별주의자다. (L이 무능하거나 잘못을 해서 해임하자는 게 아님을 기억하자.) 당신의 동성애 혐오는 취향이 아니라 정치적 신념이며, 근거를 제시하고 정당화해야 한다. 취향이므로 존중해달라는 변명 뒤에 숨어서는 안 된다.
2. 동성애는 싫지만, 아무 잘못도 없는 선생을 해임하는 것은 사생활 침해이며 잘못된 일이라는 주장을 지지할 것인가?
축하한다, 당신은 진정 평등과 인권에 대한 신념이 넘치며, 동성애 혐오는 진짜로 취향이다. 불행히도 당신 같은 사람은 소수다.
3. 아니면, L의 해임을 주장하되 그건 L이 동성애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교사로서 다른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할 것인가?
이 세 번째 경우가 가장 애매하다. L은 당신이 싫어하는 동성애를 하는 사람이다. 그가 일을 얼마나 잘 하는지, 정말로 학생들에게 잘못이 없는지 당신은 객관적으로, 또 평등하게 판단할 수 있는가? 동성애가 정말 싫고, 그 사실만으로도 L과 멀어지고 싶은데, 당신의 눈에는 정말 색안경이 없을 것인가?
개인적으로 고르라면 나는 2번이 가장 존경스럽다. 동성애는 뭔가 좀 싫다, 하지만 성적 취향 때문에 사람을 차별하는 건 내 신념에 어긋난다고 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의 취향은 진짜 취향이고, 정치적 신념이 아니다. 그러나 말했듯 이런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실제로 가장 많이 보는 경우는 1번과 3번이다. 그리고 이 경우는 더 이상 취향은 취향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오히려 3번이 가장 위험하다. 차별을 교묘하게 정당화하니까.
그래서 '취향'과 '정치적 신념'이 반대 방향인 예외적인 경우가 아닌 이상, 사회적으로 차별받는 소수자에 대한 취향은 취향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 정치적 신념이며, 따라서 정당한 비판의 대상이다. 취향이라는 말은 그저 토론을 피하는 연막일 뿐이다.
차별적 신념이든 진짜 취향이든, 터놓고 얘기하는 건 좋다. 다만 사회적, 정치적인 사안을 놓고 색상 선호나 아이돌 밴드 취미와 동일시하기는 어렵다. 취향을 놓고 토론하는 것은 무의미하지만, 취향 아닌 것을 취향이라고 우기고 토론을 거부하는 것은 부정직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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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미국에서든 아프리카에서든, 왜 그렇게 못 살고 서로 싸워대?
흑인이라고 무슨 차별을 당해야 한다거나 해악을 끼쳐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고,
그냥 흑인하고 알고 지내거나 사귀고 싶지 않을 뿐이다.
취향이니까 존중해 줘야지. 흑인인 게 무슨 감투냐?
언제나 키보드 워리어의 낙원인 이글루스에서 게이혐오 관련 글을 보면서 든 생각이다.
누군가 흑인에 대해, 아시아인에, 여자에 대해 저렇게 '취향'의 문제로 쓴다면 어떨까.
솔직히 제목하고 첫 다섯 줄 쓰면서 스스로 혐오감에 손이 떨렸지만...
분명 세상에 게이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듯이, 흑인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는 건 사실이다.
이런 건 모두 취향으로 존중받아야 할까?
어떻게 타고난 피부색으로 사람을 싫어할 수 있느냐고?
동성에게 성적으로 끌리는 것도 유전적이라는 증거가 있는 판에 왜 안 되겠는가.
게다가 무슨 해를 끼치자는 것도 아닌데, 그저 싫다는 것일 뿐이라면.
뭔가 이상하다고? 어째서 이상할까.
사실 이건 취향이 아니라는 데에 진짜 문제가 있다.
빨강보다 파랑이 좋은 건 취향이다. 소녀시대보다 원더걸즈가 좋은 것도 취향이다.
그러나 어떤 계층의 사람을 선험적으로 싫어하는 건 십중팔구 취향이 아니다.
겪어보고 좋아할 수도, 싫어할 수도 있는 개인이 아닌 소속 집단의 문제라는 점에서 이미 정치적, 사회적 사안이다.
L이라는 사람이 우리 애를 가르치는 선생인데, 알고 보니 L은 동성애자였다고 하자.
L의 선생님으로서의 자질이나 실력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다.
동성이든 이성이든 L이 학생이나 기타 미성년자에게 성적 관심을 보인 잃은 없다고 하자.
동성애자를 싫어하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1. 당장 L을 해임해야 한다고 학교에 압력을 넣거나, 그런 활동을 심적으로 지지할 것인가?
그렇다면 당신은 동성애 차별주의자다. (L이 무능하거나 잘못을 해서 해임하자는 게 아님을 기억하자.) 당신의 동성애 혐오는 취향이 아니라 정치적 신념이며, 근거를 제시하고 정당화해야 한다. 취향이므로 존중해달라는 변명 뒤에 숨어서는 안 된다.
2. 동성애는 싫지만, 아무 잘못도 없는 선생을 해임하는 것은 사생활 침해이며 잘못된 일이라는 주장을 지지할 것인가?
축하한다, 당신은 진정 평등과 인권에 대한 신념이 넘치며, 동성애 혐오는 진짜로 취향이다. 불행히도 당신 같은 사람은 소수다.
3. 아니면, L의 해임을 주장하되 그건 L이 동성애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교사로서 다른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할 것인가?
이 세 번째 경우가 가장 애매하다. L은 당신이 싫어하는 동성애를 하는 사람이다. 그가 일을 얼마나 잘 하는지, 정말로 학생들에게 잘못이 없는지 당신은 객관적으로, 또 평등하게 판단할 수 있는가? 동성애가 정말 싫고, 그 사실만으로도 L과 멀어지고 싶은데, 당신의 눈에는 정말 색안경이 없을 것인가?
개인적으로 고르라면 나는 2번이 가장 존경스럽다. 동성애는 뭔가 좀 싫다, 하지만 성적 취향 때문에 사람을 차별하는 건 내 신념에 어긋난다고 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의 취향은 진짜 취향이고, 정치적 신념이 아니다. 그러나 말했듯 이런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실제로 가장 많이 보는 경우는 1번과 3번이다. 그리고 이 경우는 더 이상 취향은 취향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오히려 3번이 가장 위험하다. 차별을 교묘하게 정당화하니까.
그래서 '취향'과 '정치적 신념'이 반대 방향인 예외적인 경우가 아닌 이상, 사회적으로 차별받는 소수자에 대한 취향은 취향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 정치적 신념이며, 따라서 정당한 비판의 대상이다. 취향이라는 말은 그저 토론을 피하는 연막일 뿐이다.
차별적 신념이든 진짜 취향이든, 터놓고 얘기하는 건 좋다. 다만 사회적, 정치적인 사안을 놓고 색상 선호나 아이돌 밴드 취미와 동일시하기는 어렵다. 취향을 놓고 토론하는 것은 무의미하지만, 취향 아닌 것을 취향이라고 우기고 토론을 거부하는 것은 부정직하지 않은가.
성형수술과 신데렐라의 두 언니, 루저 파동
TAG 시사, 일기모 TV쇼에서 벌어진 루저 발언 파동은 수많은 말과 패러디, 글을 부르면서 이제는 특별히 뭔가 덧붙일 것도 없는 대한민국 방송사의 일부분이 되었다. 정신나간 발언이었고 모욕적인 폭언이었고, 우리 사회 일부에 물든 천박한 허영을 보여주는 사건이라는 점 등등, 다 옳은 말이다.
워낙 상식없는 짓을 했으니 그 말을 한 여학생을, 그리고 그딴 식으로 방향을 유도했거나 대본을 썼을 수도 있는 (그리고 녹화방송인데 편집도 하지 않은) 제작진을 성토하는 것은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저거 나쁜년이고, 제작진들은 정신이 나갔다고 말이다. 하지만 정말 그들만이 문제일까? 우리 건전한 한국사회에서 그런 일부 '정신나간' 사람들을 성토하고 매도하면 루저 발언의 정신적, 언어적 폭력이 없어질까?
한국 사회가 얼마나 획일적이고 계층적인지는 길게 얘기해봐야 입만 (혹은 손만) 아프다. 모두가 똑같은 기준을 강요받고 그 기준을 따라가려고 헐레벌떡 따라가는 사회다. 돈이면 돈, 외모면 외모, 키면 키 다 어떤 이상적인 잣대가 있고, 그 기준은 곧 좋으이며 옳음이며 선이다. 서울은 지방보다 위고, 키가 크면 작은 사람보다 우월하고, 대졸은 고졸보다 낫고,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능가하고, 전문직과 공무원이 최고고, 예뻐야 눈이 간다. (그 미의 기준도 엄청나게 천편일률적이다.) 그 기준에 미치는 사람은 인생의 승리자다. 못 미치면? 루저~
TV에 어쩌다 나온 어린 여자아이의 말 한 마디에 한 나라가 발칵 뒤집힐 이유가 사실 얼마나 되는가. 이도경양보다 훨씬 오래 살고 많은 경험을 하고, 비교도 안 되게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의 발언에도 우리는 그렇게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사람들이 기분이 상한 것은 홍대 다니는 한 여학생이 그들을 루저라고 믿어서가 아니다. 자신이 루저라는 믿음, 혹은 두려움을 그녀가 자극했기 때문이다. 키를 포함한 그 단일하고 이상적인 사회적 기준에 못미치는 자신은 패배자가 아닐까 하는 불안은 우리 모두에게 계속 잠재해 있고, 이번 루저 소동은 그 불안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계기였다.
하나의 외부적 기준에만 자신과 삶을 맞추어야 한다는 강박은 교육, 취업, 의료(?) 분야에서 잘 관찰할 수 있다. 타고난 개성과 매력과 무관하게 자신을 어떤 이상에 맞추려는 그 끝없는 노력의 경주 속에서. 그래서 우리들은 무조건 대학에 가려고 기를 쓰고, 공무원이나 전문직, 그도 아니면 대기업 직원의 감투를 쓰려고 무진장 노력한다. 그리고 역시 타고난 모습과 상관없이 남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려고 얼굴을 뜯어고치고 다이어트를 한다. 경험도, 살아가는 모습도, 심지어 생긴 것도 모두 비슷비슷해지려는 사회적 몸부림은 눈물겹도록 치열하다. 그렇지 않으면 뒤처지니까, 패배자가 되니까.
그래서 나는 (그녀의 발언에 직접 해당사항이 없어 그런지는 몰라도) 이도경이라는 여학생이 불쌍하다. 그녀는 4천만 국민이 모두 쌍둥이가 되기를 꿈꾸는 국가적 대사업의 처연한 얼굴이다. 남의 시선을 강박적으로 의식하고 외적 잣대에 자신을 맞추는 데에 삶을 바치는 와중에 그녀에게는, 그리고 그녀와 마찬가지인 수많은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자신'이 설 자리가 없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 자신의 마음, 자신의 행복은 모두 쓰잘데기없는 패배자적 생각일 뿐일 테니까.
삶의 선택에 자신이 없이 남의 시선이 있을 뿐인 홍대 아가씨는 그래서 딱하다. 그녀의 중심이 외적 잣대가 아닌 자신이었다면 도경양은 경쟁력이니 루저니 하는 말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은 키큰 남자를 좋아한다고, 키작은 남자와도 사귈 수 있지만 키큰 남자가 취향이라고 아무도 업신여기거나 모욕하지 않고 당당히 말했을 테니까. 자신의 취향이 아닌 맞춰야만 하는 외적 잣대가 삶의 기준이 될 때 그것은 다원성이 아닌 폭력이 된다. '나는 ~~를 좋아해'가 아닌 '너는 ~~하지 않으므로 가치가 없어'가 된다. 그래서 획일화는, 그리고 획일화를 향한 강박의 이면은 사회적 폭력이다.
신데렐라 이야기의 원전에는 어린아이들에게 흔히 읽히는 판본에 빠진 대목이 있다. 무도회에 구두만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진 그녀를 찾으러 왕자가 그녀의 구두를 전국 각지로 보내 여자들에게 신어보게 했을 때, 신데렐라의 못된 두 의붓언니는 왕자비가 되는 실마리인 그 구두에 발을 맞추려고 발가락과 발뒤꿈치를 자르고 발을 우겨넣었다. 신분상승과 성공이라는 지상과제 앞에서 그녀들은 자신들의 발 모양이나 크기, 심지어 발의 온전함이나 고통에도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 신발에, 그 잣대에 자신을 맞추는 것만이 중요했다. 그 모습이 오늘날의 성형수술 열풍과 겹치며 오싹했던 사람이 나뿐일까.
외적 잣대가, 타인의 시선이 자신을 압도하는 순간 멀쩡한 발뒤꿈치와 발가락을 잘라내서라도 남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는 일은 너무 당연하게 되어버린다. 자신의 취향, 재능, 꿈, 개성, 건강 같은 별거 아닌 것들을 잘라내고 도려내서 마침내 신데렐라의 신발에 발을 우겨넣을 수 있게 되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는 한, 자신을 잘라낸 고통은 승리의 별거아닌 대가일 뿐일 테니까. 그때에야 자신을 좀먹는 모든 공허와 불안과 너는 패배자라고 속삭이는 목소리에서 자유로울 것이라고 믿어마지 않는다.
내가 너무 구식이고 고리타분한 것일까? 나는 행복은 그런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자신을 개조하려고 해도 결국 외적 기준은 외적 기준일 뿐이고, 자신의 내적 기준은 또 다른 얘기다. 화려함은 외적 기준에 맞추는 데서 나올지 몰라도 행복은 자신의 기준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외적으로 결혼, 직장, 외모 등 모든 것이 완벽한 사람들이 실은 공허와 불행에 시달리기도 하는 것을 따로 설명할 방법이 없다. 자신이 빠진 행복이란 있을 수 없으니까.
내가 생각하는 진짜 패배자는 키가 180이 안 되는 남자들이 아니다. (사실 개인적으로 키큰 남자들한텐 매력을 못 느낀다.) 자기 기준 없이 외적 잣대에, 타인의 시선에 흔들리며 그 획일적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에게 언어적, 정신적 폭력을 휘두르는 그들, 그 불쌍한 사람들이 진짜 루저다. 타인의 시선에서 행복을 찾는 이상 행복할 수도 없고, 뿐만 아니라 남까지 불행하게 하려는 것이 그들이니까. 남의 신발에 맞추려고 자기 발을 잘라내는 것처럼 어처구니 없는 짓, 딱한 루저짓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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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상식없는 짓을 했으니 그 말을 한 여학생을, 그리고 그딴 식으로 방향을 유도했거나 대본을 썼을 수도 있는 (그리고 녹화방송인데 편집도 하지 않은) 제작진을 성토하는 것은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저거 나쁜년이고, 제작진들은 정신이 나갔다고 말이다. 하지만 정말 그들만이 문제일까? 우리 건전한 한국사회에서 그런 일부 '정신나간' 사람들을 성토하고 매도하면 루저 발언의 정신적, 언어적 폭력이 없어질까?
한국 사회가 얼마나 획일적이고 계층적인지는 길게 얘기해봐야 입만 (혹은 손만) 아프다. 모두가 똑같은 기준을 강요받고 그 기준을 따라가려고 헐레벌떡 따라가는 사회다. 돈이면 돈, 외모면 외모, 키면 키 다 어떤 이상적인 잣대가 있고, 그 기준은 곧 좋으이며 옳음이며 선이다. 서울은 지방보다 위고, 키가 크면 작은 사람보다 우월하고, 대졸은 고졸보다 낫고,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능가하고, 전문직과 공무원이 최고고, 예뻐야 눈이 간다. (그 미의 기준도 엄청나게 천편일률적이다.) 그 기준에 미치는 사람은 인생의 승리자다. 못 미치면? 루저~
TV에 어쩌다 나온 어린 여자아이의 말 한 마디에 한 나라가 발칵 뒤집힐 이유가 사실 얼마나 되는가. 이도경양보다 훨씬 오래 살고 많은 경험을 하고, 비교도 안 되게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의 발언에도 우리는 그렇게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사람들이 기분이 상한 것은 홍대 다니는 한 여학생이 그들을 루저라고 믿어서가 아니다. 자신이 루저라는 믿음, 혹은 두려움을 그녀가 자극했기 때문이다. 키를 포함한 그 단일하고 이상적인 사회적 기준에 못미치는 자신은 패배자가 아닐까 하는 불안은 우리 모두에게 계속 잠재해 있고, 이번 루저 소동은 그 불안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계기였다.
하나의 외부적 기준에만 자신과 삶을 맞추어야 한다는 강박은 교육, 취업, 의료(?) 분야에서 잘 관찰할 수 있다. 타고난 개성과 매력과 무관하게 자신을 어떤 이상에 맞추려는 그 끝없는 노력의 경주 속에서. 그래서 우리들은 무조건 대학에 가려고 기를 쓰고, 공무원이나 전문직, 그도 아니면 대기업 직원의 감투를 쓰려고 무진장 노력한다. 그리고 역시 타고난 모습과 상관없이 남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려고 얼굴을 뜯어고치고 다이어트를 한다. 경험도, 살아가는 모습도, 심지어 생긴 것도 모두 비슷비슷해지려는 사회적 몸부림은 눈물겹도록 치열하다. 그렇지 않으면 뒤처지니까, 패배자가 되니까.
그래서 나는 (그녀의 발언에 직접 해당사항이 없어 그런지는 몰라도) 이도경이라는 여학생이 불쌍하다. 그녀는 4천만 국민이 모두 쌍둥이가 되기를 꿈꾸는 국가적 대사업의 처연한 얼굴이다. 남의 시선을 강박적으로 의식하고 외적 잣대에 자신을 맞추는 데에 삶을 바치는 와중에 그녀에게는, 그리고 그녀와 마찬가지인 수많은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자신'이 설 자리가 없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 자신의 마음, 자신의 행복은 모두 쓰잘데기없는 패배자적 생각일 뿐일 테니까.
삶의 선택에 자신이 없이 남의 시선이 있을 뿐인 홍대 아가씨는 그래서 딱하다. 그녀의 중심이 외적 잣대가 아닌 자신이었다면 도경양은 경쟁력이니 루저니 하는 말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은 키큰 남자를 좋아한다고, 키작은 남자와도 사귈 수 있지만 키큰 남자가 취향이라고 아무도 업신여기거나 모욕하지 않고 당당히 말했을 테니까. 자신의 취향이 아닌 맞춰야만 하는 외적 잣대가 삶의 기준이 될 때 그것은 다원성이 아닌 폭력이 된다. '나는 ~~를 좋아해'가 아닌 '너는 ~~하지 않으므로 가치가 없어'가 된다. 그래서 획일화는, 그리고 획일화를 향한 강박의 이면은 사회적 폭력이다.
신데렐라 이야기의 원전에는 어린아이들에게 흔히 읽히는 판본에 빠진 대목이 있다. 무도회에 구두만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진 그녀를 찾으러 왕자가 그녀의 구두를 전국 각지로 보내 여자들에게 신어보게 했을 때, 신데렐라의 못된 두 의붓언니는 왕자비가 되는 실마리인 그 구두에 발을 맞추려고 발가락과 발뒤꿈치를 자르고 발을 우겨넣었다. 신분상승과 성공이라는 지상과제 앞에서 그녀들은 자신들의 발 모양이나 크기, 심지어 발의 온전함이나 고통에도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 신발에, 그 잣대에 자신을 맞추는 것만이 중요했다. 그 모습이 오늘날의 성형수술 열풍과 겹치며 오싹했던 사람이 나뿐일까.
외적 잣대가, 타인의 시선이 자신을 압도하는 순간 멀쩡한 발뒤꿈치와 발가락을 잘라내서라도 남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는 일은 너무 당연하게 되어버린다. 자신의 취향, 재능, 꿈, 개성, 건강 같은 별거 아닌 것들을 잘라내고 도려내서 마침내 신데렐라의 신발에 발을 우겨넣을 수 있게 되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는 한, 자신을 잘라낸 고통은 승리의 별거아닌 대가일 뿐일 테니까. 그때에야 자신을 좀먹는 모든 공허와 불안과 너는 패배자라고 속삭이는 목소리에서 자유로울 것이라고 믿어마지 않는다.
내가 너무 구식이고 고리타분한 것일까? 나는 행복은 그런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자신을 개조하려고 해도 결국 외적 기준은 외적 기준일 뿐이고, 자신의 내적 기준은 또 다른 얘기다. 화려함은 외적 기준에 맞추는 데서 나올지 몰라도 행복은 자신의 기준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외적으로 결혼, 직장, 외모 등 모든 것이 완벽한 사람들이 실은 공허와 불행에 시달리기도 하는 것을 따로 설명할 방법이 없다. 자신이 빠진 행복이란 있을 수 없으니까.
내가 생각하는 진짜 패배자는 키가 180이 안 되는 남자들이 아니다. (사실 개인적으로 키큰 남자들한텐 매력을 못 느낀다.) 자기 기준 없이 외적 잣대에, 타인의 시선에 흔들리며 그 획일적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에게 언어적, 정신적 폭력을 휘두르는 그들, 그 불쌍한 사람들이 진짜 루저다. 타인의 시선에서 행복을 찾는 이상 행복할 수도 없고, 뿐만 아니라 남까지 불행하게 하려는 것이 그들이니까. 남의 신발에 맞추려고 자기 발을 잘라내는 것처럼 어처구니 없는 짓, 딱한 루저짓이 또 있을까.
로젠스트라세 - 시민 저항의 힘에 대하여
TAG 2차대전, 시사, 역사정확한 지명이나 역사적 배경은 생각나지 않지만, 점령지의 남자를 학살하는 걸로 악명이 높은 군주에 항복한 성 이야기를 들어보았는지 모르겠다. 저항 끝에 성문을 열 수밖에 없게 되자 여자들은 적군에 대표를 보내 여자들은 두 팔에 들고 갈 수 있을 만큼의 가장 귀하고 필요한 재물만을 가지고 평화롭게 떠나게 해달라고 요청했고, 군주는 이를 허락했다.
다음날 아침, 성주 부인을 포함해 성의 모든 여자들은 패물도, 금화도 아닌 남편을 있는 힘을 다해 양팔에 안고 성문을 나왔다. 이 모습을 보고 크게 감동한 군주는 남자들을 죽이지 않았을 뿐더러 그 성의 주민에게는 유례없이 온정적으로 대했다고 한다. 여성들의 기지와 헌신, 숨은 낭만주의자였던 정복 군주, 그리고 아내 품에 공주님 안기로 안겨나온 남자들(...)이 기억에 남는 이야기였다.
20세기에도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있다. 그것도 배경은 2차대전 중 독일, 상대는 히틀러의 악명높은 게슈타포였다. 1943년 베를린 중심부의 로젠스트라세 (Rosenstrasse, 장미의 거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스탈린그라드에서 패배한 독일 제3 제국은 베를린에 잔류한 모든 유대인을 수용소로 강제이송하는 결정을 내렸다. (전쟁 중에 왜 그딴 데에 힘을 쏟았는지는 미지수다.) '아리아인'과 결혼했기에 그동안 강제이송을 피했던 이들 유대인은 대부분 독일 여자와 결혼한 남자들이었다. 이송을 앞두고 이들은 로젠스트라세 2-4번지에 갇혀있었다.
금새 로젠스트라세에는 남편이 체포당한 여자들이 "남편을 돌려달라"며 모이기 시작했다. 목격자들은 첫날에 600여명이 모였으며, 일 주일 동안 총 6000명 정도가 참여했다고 추산한다. 많은 여인들이 출근하는 길에 이 거리에 꼬박꼬박 들렀다. 무기도, 조직도, 지도자도 없는, 대부분 여성인 시위대에 경찰은 몇 번이나 발포 위협을 하며 해산하려고 했지만, 이들은 물러나는가 싶으면 다시 몰려왔다. 체포는 기정사실 갈았고, 유혈극이 벌어지지나 않으면 다행인 상황이었다.
이렇게 며칠 동안이나 시위가 끊이지 않자 게슈타포는 기관총을 설치하고 총구를 여인들에게 겨누었다. 누구라도 모골이 송연할 상황에 시위대는 순간 주춤주춤 물러났다. 하지만 그러고 나서 앞다퉈 도망쳐도 시원찮은데 이 독일 아줌마들, 오히려 화가 머리끝까지 뻗쳤다. 어차피 죽을 거면 소리라도 지르고 죽어야지. "살인자! 살인자! 살인자! 살인자!" 죽음을 각오한 여인들의 노호가 장미의 거리를 메웠다.
히틀러의 선전관 괴벨스는 베를린의 나치당 지구장이기도 했다. 여인들을 거리에서 쏴죽이는 건 도덕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나치에게는 일도 아니었다. (사실 유대인이었으면 벌써 죽거나 끌려갔다.) 그러나 괴벨스는 파급 효과를 염려했다. 가뜩이나 불리한 전황에 민심 이반을 조심해야 하는데 베를린 심장부에서 시위가 자꾸 길어진다면, 혹은 독일 여인들이 게슈타포에 사살당하면 자칫 더 큰 저항을 부를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괴벨스는 여인들의 요구대로 남편들을 석방하라고 명령했다. 그에 따라 근 2천 명이 풀려났고, 그들도 그들 가족도 더는 당국에 아무 해코지도 당하지 않고 대부분 종전까지 무사히 살아남았다.
이 일화는 제3 제국의 그 살벌한 상황 중에도 시민 불복종으로 놀라운 결과를 낸 사례라는 점에서 독일 국민들이 만약에 더 적극적으로 저항했더라면 역사는 달라졌을까, 하는 불편한 의문을 남기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전세가 기울면서 당국이 오히려 시민의 눈치를 봐야 했고, 시위 자체가 매우 비정치적인 성격이었고, 시위대가 주로 독일 여성이었던 점 등 특수한 상황이 성공을 이끌어냈다고 본다. 따라서 로젠스트라세를 가리키며 '독일 국민이 저항했으면 되지 않느냐'고 일반화하기는 좀 섣부르지 않을까. 물론 아무리 독재라도, 아니 독재일 수록 정부는 단합한 시민을 두려워한다는 일반화는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 드는 생각이라면 아줌마는 역시 무섭다는 거(...) 게슈타포가 불쌍하다고 순간이나마 생각한 건 평생 처음이었다. 애들 아빠가 위험해서 눈에 보이는 게 없는 600명의 아주머니가 '살인자!'를 외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아무리 게슈타포라도 사람인 이상 평생 엄마한테 혼난 모든 기억이 총천연색 블루레이 동영상으로 떠오르면서 식은땀이 흘렀을 거다. 이래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권세, 생사람 인생을 하루아침에 절단내는 독재가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결국 땅 위가 아니면 무엇이 설 수 있을까. 모든 권력과 모든 삶의 기반에 있는 것은 평범한 사람, 보편적이고 소박한 감정이다. 옆집 아줌마가 아저씨를 위해서라면 총부리 앞에서도 눈을 부릅뜰 수 있는 마음이 바로 권력도 이기는 힘이다. 그래서 권력은, 독재는 언제나 시민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료출처
Rosenstrasse Documentary
Rosenstrasse Prot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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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성주 부인을 포함해 성의 모든 여자들은 패물도, 금화도 아닌 남편을 있는 힘을 다해 양팔에 안고 성문을 나왔다. 이 모습을 보고 크게 감동한 군주는 남자들을 죽이지 않았을 뿐더러 그 성의 주민에게는 유례없이 온정적으로 대했다고 한다. 여성들의 기지와 헌신, 숨은 낭만주의자였던 정복 군주, 그리고 아내 품에 공주님 안기로 안겨나온 남자들(...)이 기억에 남는 이야기였다.
20세기에도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있다. 그것도 배경은 2차대전 중 독일, 상대는 히틀러의 악명높은 게슈타포였다. 1943년 베를린 중심부의 로젠스트라세 (Rosenstrasse, 장미의 거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스탈린그라드에서 패배한 독일 제3 제국은 베를린에 잔류한 모든 유대인을 수용소로 강제이송하는 결정을 내렸다. (전쟁 중에 왜 그딴 데에 힘을 쏟았는지는 미지수다.) '아리아인'과 결혼했기에 그동안 강제이송을 피했던 이들 유대인은 대부분 독일 여자와 결혼한 남자들이었다. 이송을 앞두고 이들은 로젠스트라세 2-4번지에 갇혀있었다.
금새 로젠스트라세에는 남편이 체포당한 여자들이 "남편을 돌려달라"며 모이기 시작했다. 목격자들은 첫날에 600여명이 모였으며, 일 주일 동안 총 6000명 정도가 참여했다고 추산한다. 많은 여인들이 출근하는 길에 이 거리에 꼬박꼬박 들렀다. 무기도, 조직도, 지도자도 없는, 대부분 여성인 시위대에 경찰은 몇 번이나 발포 위협을 하며 해산하려고 했지만, 이들은 물러나는가 싶으면 다시 몰려왔다. 체포는 기정사실 갈았고, 유혈극이 벌어지지나 않으면 다행인 상황이었다.
이렇게 며칠 동안이나 시위가 끊이지 않자 게슈타포는 기관총을 설치하고 총구를 여인들에게 겨누었다. 누구라도 모골이 송연할 상황에 시위대는 순간 주춤주춤 물러났다. 하지만 그러고 나서 앞다퉈 도망쳐도 시원찮은데 이 독일 아줌마들, 오히려 화가 머리끝까지 뻗쳤다. 어차피 죽을 거면 소리라도 지르고 죽어야지. "살인자! 살인자! 살인자! 살인자!" 죽음을 각오한 여인들의 노호가 장미의 거리를 메웠다.
히틀러의 선전관 괴벨스는 베를린의 나치당 지구장이기도 했다. 여인들을 거리에서 쏴죽이는 건 도덕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나치에게는 일도 아니었다. (사실 유대인이었으면 벌써 죽거나 끌려갔다.) 그러나 괴벨스는 파급 효과를 염려했다. 가뜩이나 불리한 전황에 민심 이반을 조심해야 하는데 베를린 심장부에서 시위가 자꾸 길어진다면, 혹은 독일 여인들이 게슈타포에 사살당하면 자칫 더 큰 저항을 부를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괴벨스는 여인들의 요구대로 남편들을 석방하라고 명령했다. 그에 따라 근 2천 명이 풀려났고, 그들도 그들 가족도 더는 당국에 아무 해코지도 당하지 않고 대부분 종전까지 무사히 살아남았다.
이 일화는 제3 제국의 그 살벌한 상황 중에도 시민 불복종으로 놀라운 결과를 낸 사례라는 점에서 독일 국민들이 만약에 더 적극적으로 저항했더라면 역사는 달라졌을까, 하는 불편한 의문을 남기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전세가 기울면서 당국이 오히려 시민의 눈치를 봐야 했고, 시위 자체가 매우 비정치적인 성격이었고, 시위대가 주로 독일 여성이었던 점 등 특수한 상황이 성공을 이끌어냈다고 본다. 따라서 로젠스트라세를 가리키며 '독일 국민이 저항했으면 되지 않느냐'고 일반화하기는 좀 섣부르지 않을까. 물론 아무리 독재라도, 아니 독재일 수록 정부는 단합한 시민을 두려워한다는 일반화는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 드는 생각이라면 아줌마는 역시 무섭다는 거(...) 게슈타포가 불쌍하다고 순간이나마 생각한 건 평생 처음이었다. 애들 아빠가 위험해서 눈에 보이는 게 없는 600명의 아주머니가 '살인자!'를 외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아무리 게슈타포라도 사람인 이상 평생 엄마한테 혼난 모든 기억이 총천연색 블루레이 동영상으로 떠오르면서 식은땀이 흘렀을 거다. 이래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권세, 생사람 인생을 하루아침에 절단내는 독재가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결국 땅 위가 아니면 무엇이 설 수 있을까. 모든 권력과 모든 삶의 기반에 있는 것은 평범한 사람, 보편적이고 소박한 감정이다. 옆집 아줌마가 아저씨를 위해서라면 총부리 앞에서도 눈을 부릅뜰 수 있는 마음이 바로 권력도 이기는 힘이다. 그래서 권력은, 독재는 언제나 시민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료출처
Rosenstrasse Documentary
Rosenstrasse Protest
출산과 육아에 대한 생각
TAG 시사내가 사는 곳 바로 앞에는 어린이집이 있어서 출퇴근할 때면 부모나 조부모가 아이를 맡기고 찾아가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근처에는 또 초등학교, 중학교도 있어서 아이들이 집단체조하고 노는 소리가 심심찮게 들려오고, 일할 때면 창밖에 꼬마들이 놀이터에서 노는 모습이 보인다. 출산율이 극도로 낮아졌다지만 난 주변에 애들이 유달리 많은 환경에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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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때마다 드는 생각, 뭐가 좋아서 저렇게 낳고 기를까? 애들은 이쁘기는 하지만 그것도 자기 책임이 없는 남의 애 얘기지, 오래 같이 있으려다 보면 시끄럽고 정신없고 잠시도 안심이라고는 할 수 없고 종종 무례하고 막무가내다.
어머니의 삶에 아이가 끼치는 영향은 길게 얘기해봤자 입만 아프다. 일차적인 육아책임은 어머니에게 있다는 것이 사회적 인식이니 어머니가 된 순간부터 편할 날이 있을까. 직장에서는 눈치보여, 집에서는 힘들어, 남편이란 사람은 돈 번다고 (애는 또 돈 잡아먹는 괴물이니) 보이지도 않아... 애는 잘 있나 종일 걱정하면서 칼퇴근해서 애 찾아다 애가 빽빽거리는 집을 치울 생각에 이미 난소가 "나 안해!" 하고 오그라드는 것만 같다.
물론 그런 과정이 있었으니까 나도 태어나서 비교적(?) 무사히 자랐고, 그 과정에서 부모님이 하신 희생에는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하겠다는 사람들에게는 경의를 표하고, 대한민국의 개같은 출산과 육아지원정책이 빨리 좋아지도록 노력하고 싶다. 하지만 적어도 현재로서는 내가 개인적으로 출산과 육아라는 엄청난 과업을 해낼 생각은 별로 없다.
타임지의 김대중 대통령 회고 사진들
TAG 시사시사주간지 타임에서 김대중 전대통령 회고 사진 에세이를 올렸다. 대부분 전에도 본 사진이지만 새삼 이게 전세계적 뉴스라는 걸 느낀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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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77
TAG 시사미국과 러시아가 핵무기 감축을 논하는 가운데 원폭 생존자인 디자이너 미야키 잇세이가 핵 없는 세상을 위한 호소를 해서 눈길을 끌었다. '원폭 생존자 디자이너'로 알려지고 싶지 않아 평생 이 문제에 대해 침묵했던 미야키는 4월 오바마가 프라하에서 한 연설에 마음이 움직였다고.
글에 달린 댓글들도 재밌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참상 얘기라든지... 그러다 댓글 하나를 보니 자신이 사는 도시를 공격할 수 있는 원폭의 수를 알 수 있는 사이트가 있다고 해서 해보았다. 그 댓글 단 사람의 7000개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졌다?!) 서울을 공격할 수 있는 원폭은 6277개라고 한다. 일단 우방이라고 할 미국과 영국 것을 제외해도 4821개.
사람이 이런 상황에도 태연하게 살아갈 수 있는 건 재미있는 일이다. 다르게 말하면 일일히 신경쓰기 시작하면 미친다는 얘기기도 하다. 핵무기와 핵 기술이 점점 퍼지기만 하는 세상이 내 생전에 비핵화되기는 어렵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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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달린 댓글들도 재밌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참상 얘기라든지... 그러다 댓글 하나를 보니 자신이 사는 도시를 공격할 수 있는 원폭의 수를 알 수 있는 사이트가 있다고 해서 해보았다. 그 댓글 단 사람의 7000개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졌다?!) 서울을 공격할 수 있는 원폭은 6277개라고 한다. 일단 우방이라고 할 미국과 영국 것을 제외해도 4821개.
사람이 이런 상황에도 태연하게 살아갈 수 있는 건 재미있는 일이다. 다르게 말하면 일일히 신경쓰기 시작하면 미친다는 얘기기도 하다. 핵무기와 핵 기술이 점점 퍼지기만 하는 세상이 내 생전에 비핵화되기는 어렵겠지.
이란의 밤 - "알라는 위대하시다!"
TAG 시사, 이란, 종교허핑턴 포스트에서 본 비디오. 마흐무드 아흐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이 선거 결과를 조작해서 중임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수십만의 이란 시민이 거리로 나서자 정권에서는 휴대폰 문자도 막아버리는 등 통신을 방해하고 비무장 시위대에 총격을 가하며 위협하고 있다. 그 중에 이란 (아마도 아흐마디네자드 반대가 가장 심한 테헤란)에서는 사람들이 밤에 알라는 위대하시다! (Allaho akbar!)를 외치고 있다. 다음이 그 비디오이다. (거의 오디오만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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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도 가슴을 울리지만, 중간에 나오는 여성의 목소도 찡하다. "전화와 인터넷과 통신을 다 빼앗겨도 우리는 '알라는 위대하시다'고 외치며 서로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밤 우리는 신께 외치며 도움을 청합니다."
종교에 별로 감흥이 없는 나이고 종교를 등에 업은 권위주의는 특히 반대하지만, 밤중에 신을 부르며 화답하는 사람들의 절박하고 간절한 목소리에는 감동받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의 종교적 신심은 곧 공동체 의식이기 때문일까. 통신을 차단당한 시위대를 묶어줄 뿐 아니라, 가장 안전한 저항의 표시일 정도로 시위대와 당국마저 묶어주는 공동체이기에.
또한, 밤에 이란의 시민들이 부르는 신은 자유의 이름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민주주의여 만세' 부르는 목소리가 바로 저럴 것이라고 누가 의심할 수 있는가?1 종교의, 신앙의 참 모습은 고통스러운 속박이 아닌, 모든 인간이 성장하고 배우고 행복할 수 있는 안전을 주는 자유일 거라고... 그렇게 나는 믿고 싶고, 또 믿고 있다. 그것이 어쩌면 나의 유일한 종교일지도 모르지.
"오 신이여! 폭군이 지배하는 이 땅에서 우리를 해방하소서."- 코란 4:75 中
조지 틸러의 삶과 죽음
TAG 시사5월 31일 미국 캔자스에서는 낙태 시술 의사 조지 틸러 (George Tiller)가 평소 다니는 교회에서 총격을 당해 향년 67세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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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를 시술하는 의사가 또 살해당했다는 사실 외에도 낙태의 자유를 주장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 양측에 틸러의 존재는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그는 미국에서 임신 20주 이후의 낙태를 시술하는 단 세 명의 의사 중 하나였기에.
20주 이후의 임신 3분기 태아는 매우 성장한 상태이며, 모체 외에서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경우도 있으므로 가뜩이나 예민한 낙태 사안 중에도 더욱 첨예한 대립이 있는 사안이다. 그래서 틸러의 클리닉은 유달리 심한 시위에 시달렸고, 그는 1993년에 양팔에 총격을 당하기도 했으며, 스토킹을 당하다가 연방 수사관 경호를 근 3년 받았고, 형사소송을 당했다가 무죄 판결이 나기도 했다. 그리고 결국은 교회에서 가족과 친지 눈앞에서 살해당했다.
극심한 시위와 협박에 시달리면서도 그가 일을 계속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돈이 벌리는 것도 분명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훨씬 안전한 일도 많은데도 굳이 낙태 시술을 계속했던 이유를 그는 '여성들에게 내가 필요해서'라고 말했다.
낙태 클리닉과 시술자, 직원에 대한 시위와 폭탄 테러와 암살은 확실히 효과가 있어서, 미국에서는 낙태를 가르치는 의과대학도 줄어들고 있고 그 수많은 어려움을 견디면서 굳이 낙태를 시술하는 의사도 줄고 있다. 결국 낙태 반대론자들은 어느 정도는 성공한 셈이다. 낙태를 살인으로 규정하지는 못했지만 낙태에 대한 접근을 어렵게 만드는 데는 성공했으니까.
그래서 틸러의 죽음은 (살해행위 자체를 비난하면서도) 낙태 반대론자들에게는 승리이다. 적어도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틸러에게 살해당하는 태아는 그만큼 줄어들었을 테니까. 그러나 과연 그럴까? 여성을 위한다는 틸러의 말은 그저 위선에 지나지 않았을까?
낙태를 법으로 금지해서 정말로 태아를 구할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이다. 태아가 사람이건 아니건 간에 산모의 몸속에 있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그 존재를 숨기기도 쉽고, 아무도 모르게 처리할 수도 있다. 그리고 실제로 낙태가 불법을 통해 음성화되면 여자들은 낙태를 포기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수가 몰래 아이를 떼려고 한다. 여자들이 아이를 떼는 건 '심심한데 낙태나 해볼까' 하는 심리가 아니고 도저히 낳을 수가 없는 것이므로 합법이든 불법이든 낙태를 선택하는 거다. 다만, 불법이면 불법 시술자에게 위험하고 비위생적인 시술을 받는 차이가 있다.
그래서 의사가 시술하는 합법적인 낙태는 태아를 죽이는 게 아니라 산모를 살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미래에 아이를 낳기로 선택한다면, 미래의 아이 또한 살리는 행위이다. 태아가 불법으로 위험하게 낙태당한다고 해서 안전하게 의사에게 낙태당하는 것보다 뭐가 나을 게 있는가? 그저 임신한 여성, 그리고 그 여성이 미래에 낳을 수 있을 아이들만 위험해질 뿐이다. 나는 이게 낙태 불법화 주장의 최대 허점이며 도덕적 공허라고 본다.1
그래서 조지 틸러는 여성들에게 자신이 필요하기에 아무리 위험해도 그만둘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총을 맞아도, 가족까지 협박에 시달려도, 클리닉을 요새화해야 할 정도로 시위와 테러 위협이 극심해져도. 그의 사무실 벽에는 환자들의 감사 노트가 즐비하다고 한다. 틸러는 낙태 일을 가리켜 젊음을 앗아가고, 피가 마르도록 지치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자신을 필요로 하는 여성들을 실망시킬 수는 없다고 했다.
틸러에게 3분기 낙태 시술을 받은 한 여성의 이야기가 있다. 9년 전, 미리엄 클라이만은 29주 된 태아의 두뇌에 심각한 이상이 있어서 태내에서, 혹은 출산 직후에 아이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죽어가는 아이를 도저히 두 달 동안 태내에 품고 있을 수 없었던 그녀는 그렇게 늦은 낙태를 시술하는 사람은 없다는 의사에게 빌다시피 해서 틸러의 이름을 받았다. 그리고 남편과 함께 극렬한 시위대를 뚫고 틸러의 요새와 같은 클리닉에 들어가 시술을 받았고, 떼어낸 태아를 집으로 데려와 장례를 치러주었다. 지금 그녀는 두 아들의 어머니이다.
그녀와 그녀의 가족에게 무엇이 옳은 선택이었는지 타인인 우리가 어떻게 얘기할 수 있는가? 어차피 죽을 아이인데 굳이 수술까지 해서 떼어냈어야 했냐고 욕할 수 있는가? 두 달 동안 몸 속에서 아이가 죽기를 기다리며 (그리고 태내에서 죽었으면 어차피 떼어냈어야 했다) 서서히 피가 마르는 게 어머니로서 그녀의 의무였을까? 결국 참지 못하고 낙태가 불법인 나라에서 몰래 불법 수술을 받고 그녀가 감염으로 죽거나 자궁을 들어내서 지금의 두 아들도 영영 태어날 수 없게 되는 땅이 낙태 반대론자들의 유토피아겠지.
사람에 따라서는 남은 두 달만이라도 임신한 채 작별인사를 하기 원했을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클라이만과 마찬가지로 그 상황을 견딜 수가 없다. 어느 쪽이 옳은지 그녀 자신과 가족이 아닌 누가 정하는가? 그리고 아이가 생긴 것을 뒤늦게서야 안 여성에게, 역시 무엇이 옳은지 타인이 정해줄 수 있는가? 도저히 아이를 낳을 수가 없는 상황이 된 여성에게는? 누가 그 결정을 내리는가?
조지 틸러는 여성에게 그 결정을 내릴 권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자의 손에 살해당했다. 반 낙태 단체들은 이 살인을 정죄하면서도 조지 틸러는 대량학살자였다고 강조한다. 천하의 어리석은 바리새인들, 독사의 자식들, 회칠한 무덤 같은 자들. 조지 틸러는 아기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여성을 살리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사실 여성을 돕는 것은 조지 틸러를 죽인 자와 그 사상적 동지들에게는 아기를 학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니 더 무거운 죄이겠지. 여성이 안심하고 건강하게 사는 세상은 권위주의적 통제가 설 곳이 없는 세상이니까. 여성과 섹스를 두려움과 죽음의 위협으로 통제하는 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 억압적 종교·정치적 권력의 근간이었기에.
그리고 그 통제가 약해져가는 것은 권위주의자들에게는 한없이 두려운 일일 것이다. 공포와 미신, 증오가 가득한 그들의 세상이 죽어가는 시대에 그들은 이렇게 폭력으로 맞서 싸우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해도 몰려오는 현대화와 세속화의 파도를 막을 수는 없다는 점이 그들의 비극이다. 그 싸움의 과정에서 조지 틸러처럼 용기있는 사람이 희생당했다는 사실은 더 큰 비극이고.
링크
이전에 썼던 낙태 자유화 찬성 글
낙태 반대운동의 결과 - Unborn in the USA 혹은 Lake of Fire (다큐멘터리)에서 들었다
주석
- 물론 낙태 불법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우선순위 여성 건강이니 생명이니 하는 기능론적 혹은 공리주의적 사고가 아니라 감히 애를 떼려는 더러운 X들이 합당한 대가를 치르는 거니까--감염으로 죽건, 자궁을 들어내건 죄없는 생명을 죽인 대가인 거지--징벌적 사고의 관점에서 본다면 허점은 아니다. 코미디언 조지 칼린이 말했듯 낙태 불법화의 발로는 친생명이 아니라 반여성이다. [돌아가기]
당신은
TAG 시사, 일기부러지되 휘지 않는 철과 같던 당신을 부러뜨릴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당신뿐이었겠지요.
타협을 모르는 이상가였던 당신은 정치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그만큼 당신의 바보스러움이 더 절실합니다. 요즘 같은 때에는...
당신을 추도하려고 모인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당신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했습니다.
언젠가는 당신과 같은 사람이 통하는 날이 우리에게도 올까요.
이 땅이 이상가가 행복한 곳이 될 수 있을까요.
가장 무거운 자리에 있으면서도
가장 무거운 것은 자리가 아니라 슬픔이었겠지요.
훌훌 다 털고 떠나간 끝에 마침내 편안하시길.
누구나 똑똑하고 교활한 이 땅에서
요령도 수완도 없이 살아간 바보, 노무현 전 대통령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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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협을 모르는 이상가였던 당신은 정치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그만큼 당신의 바보스러움이 더 절실합니다. 요즘 같은 때에는...

당신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했습니다.
언젠가는 당신과 같은 사람이 통하는 날이 우리에게도 올까요.
이 땅이 이상가가 행복한 곳이 될 수 있을까요.
가장 무거운 자리에 있으면서도
가장 무거운 것은 자리가 아니라 슬픔이었겠지요.
훌훌 다 털고 떠나간 끝에 마침내 편안하시길.
누구나 똑똑하고 교활한 이 땅에서
요령도 수완도 없이 살아간 바보, 노무현 전 대통령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