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작(?) 다크 나이트를 봤다. 기법상 굉장히 세련되게 잘 찍은 영화고, 모든 사람이 입을 모아 말하듯 조커의 연기는 압권이었다. 이래서야 히쓰 레져가 사후 남우조연상 수상 못했다가는 아카데미 욕 바가지로 먹을 듯. 아니, 그 영화에서의 비중을 보면 주연일지도 모른다. (...)
다크 나이트는 근본적으로는 복잡한 윤리극이라고 생각한다. 끝없이 도덕성을 두고 고민시키고, 딱히 떨어지는 답 없이 많은 해석의 여지와 그늘을 남긴다. 하지만 결국 수퍼히어로/헐리우드의 한계를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해서, 특히 끝에 가서 너무 친절하게 포장해서 먹여준 주제의식과 배트맨 우러르기는 좀 별로였다.
1. 고담 최악: 영화 내내 고담 경찰은 세계적 수준의 무능과 부패를 자랑했다. 조커한테 매번 당하는데 나중엔 짜증났다. 저런 경찰을 (게다가 줄거리상 그 중 상당수는 범죄조직 끄나풀) 세금으로 먹여살리느니 이사간다. ㅡㅡ;; 범죄와 테러가 저렇게 많은 곳에 왜 살어. 설마 고담 벗어나면 오히려 더 위험한 무시무시한 디스토피아인 걸까.
2. 사내연애의 허와 실: 하비 덴트와 레이첼 도스의 관계는 영화 보면서 좀 고개를 갸웃한 부분. 덴트 쪽이 선거직 고담 검사장이니까 레이첼은 그의 부하 검사라는 얘기인데, 저런 상황에서의 연애란 상당히 애매모호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서 수근거리기도 딱 좋은 구도고. 덴트가 완전 새내기 검사장이고 전부터 사귀던 사이여서 아직 문제가 될 시간이 없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영화 첫 장면에서처럼 사건도 같이 맡는 직속 상관과의 연애는 득보다 실이 많다고 생각한다.
3. 자랑스러운 고담시 경찰력: 첫 재판 장면 하니, 왜 그놈의 총은 못 찾았는지 모르겠다. 금속제가 아니라고 뭐라고 뭐라고 설명하기는 했는데, 아무리 금속제가 아니라고 해도 크기는 꽤 큰데 제대로 수색만 했어도 그냥 나왔겠다. 고담 경찰은 무능하고 부패한 걸로 부족해서 게으르기까지 한 건가, 아니면 손 감각이 둔한 걸까.
4. 돈은 또 다른 수퍼파워다: 아이언 맨 주인공도 그렇지만 여기서도 수퍼히어로는 초인이 아닌, 돈과 과학기술로 처바른 전투원이다. 아무리 기술이 현존해도 비용 대 효용 대비 때문에 일반 경찰이나 군대에서는 못 쓰는, 내지는 유출을 우려해서 수퍼히어로 혼자서만 알고 쓰는 기술력의 영웅.
어찌보면 그래서 이들은 초인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아이언 맨도 배트맨도 돈을 물려받은 대갑부이니, 그게 유전적으로 초능력을 타고나는 것과 크게 다르겠는가. 아이언 맨 쪽은 천재적인 두뇌까지 있었으니 더더욱 그들은 초인이 맞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초능력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누구든지 벌수 있(다고 하)는 돈으로 무장했다는 점에서 좀 더 가깝게 느껴지는 건 있다. 배트맨이 등장하는 두 번째 장면인가가 상처를 꿰메는 모습인 점도 그렇고, 전반적으로 꽤 인간적인 수퍼히어로라는 느낌? 그게 영화 자체의 테마와 들어맞기도 하고.
5. 그들이 스위치를 누르지 않은 이유: 배 두 척을 두고 한 시간 제한이 있는 죄수 딜레마 게임을 ('쟤를 배신하고 네가 살래? 안하면 쟤가 먼저 배신할 거야.') 장면에서, 정말로 그 스위치가 상대편 배 기폭 장치인지 누가 아는가. 조커가 그렇게 얘기해서? 승한군이 다른 사람들도 같은 얘기를 했다고 하지만, 조커는 의외로 거짓말은 안하니까 일단 자기 배가 아닌 상대편 배 기폭 장치가 맞았다고 치자.
하지만 진실이 어땠든지 간에 사실 도시를 박살내는 테러리스트 말을 시민들이 굳이 믿을 이유가 어디 있는가. 그 캐감동(?)의 스위치 안 누르는 장면의 진상에 대한 내 생각은 이렇다. 스위치에 대해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일단 조커는 미친놈이고 사람 갖고 노는 것을 즐긴다. 따라서 상대편 배 기폭 스위치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이쪽 배 기폭 장치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양쪽 배 모두 선택은 '살인을 저지르고 살아남거나, 살인을 저지르지 않고 죽을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가 된다. 조커가 진실을 얘기하고 있다면 그게 선택이겠지만, 조커의 말이 거짓말이고 스위치가 이쪽 배의 기폭 스위치라면 '자살하거나 살아남는 것'이 된다.
죄수 딜레마 게임의 기본 전제는 동료를 배신하면 정말로 이익이 있다는, 즉 제시하고 있는 게임이 진실이라는 것이다. 딜레마에 몰아넣은 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아무것도 성립하지 않는다. 물론 미치광이 테러리스트가 세상에서 가장 신뢰할 만한 놈이라면 할 말 없지만 (적어도 고담 경찰보다는 신뢰할 수 있을지도), 나라면 그 스위치를 잡은 순간 대충 이런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쳐갈 것이다.
'우리가 누르지 않으면 저쪽에서 눌러버릴 거야! 그래, 누르자! 하지만... 정말 조커 말을 믿을 수 있어? 만약에 저 미치광이가 거짓말, 아니 '농담'을 하고 있다면 누르는 순간 자살이잖아. (식은땀) 그리고 거짓이라면... 아, 그러면 저쪽 배는 누르는 순간 그냥 혼자 꼬라박고 끝나는 거고, 나한테는 아무 위험도 없잖아. 조커의 진실성에 정말 목숨까지 걸 수 있어? 에라 모르겠다, 정말 100% 확실하다면 누르겠지만 조커를 믿을 수 없는 한은 자살의 위험은 무릅쓰지 않을래.'
다크 나이트를 윤리극이라고 하는 게, 개인적이고 현실적인 관점보다는 추상적 관념이 전제라는 점 때문에 그렇다. 즉, 여기서는 죄수의 딜레마가 진실이라고 믿어야 감동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조커가 사실을 말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위에 말했듯 거짓말은 안하니까.
하지만 윤리극의 관점에서 벗어나 죄수의 딜레마를 조금만 삐딱하게 보면, 그리고 현실적인 인간의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사실 스위치를 누르지 않은 이유는 대단한 양심 같은 것일 수가 없다. 아무 확인 없이 미친 테러리스트 말만 믿고 자살과 살인 중에 선택해? 어림도 없지.
뭐 까짓거 우리의 훌륭한 덴트씨라면...
레이첼의 죽음 전: '동전 던져서 앞면이 나오면 안 누르고, 뒷면이 나오면 누른다.' (...)
레이첼의 죽음 후: '동전 던져서 앞면이 나오면 안 누르고, 뒷면이 나오면 누른다.' ㅡ0ㅡ
6. 수퍼히어로 여자친구의 조건: 수퍼히어로물의 전형을 또 비튼 건 원작에는 없는 레이첼 쪽 줄거리였다고 본다. 수퍼히어로에 목맨 여자가 아니라 그의 처지에 공감하고 가슴아파하면서도 결국은 마지막 편지에서 드러났듯 자기 마음을 당당하게 따르는 모습이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다.
남친 때문에 위험에 빠지는 것은 수퍼히어로 여자친구의 나름 운명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하비 덴트 때문에 표적이 된 후에 위험을 알면서도 브루스의 아파트를 떠난 대목에서 볼 수 있듯 레이첼이 브루스와 함께하지 않은 건 신변의 위협 때문이 아니었다. 덴트는 방패막이 눈가림용 남친이 아니었다는 얘기지. 브루스는 그렇게 믿고 싶어했지만. 그에게 그 믿음이 필요한 것을 알았기에 알프레드는 편지를 태운 것이고.
자막에는 반영이 되지 않았지만 '브루스 네가 배트맨을 필요로 하지 않는 날은 오지 않을 거야.'라는 대사가 레이첼이 한 선택의 열쇠였다고 본다. 배트맨을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은 고담시라기보다는 브루스의 어두운 면이었으니까. 그 그늘진 영웅의 모습에 가슴 설레는 수퍼히어로 팬이 아닌, 친구의 진실한 모습을 직시하고 공감하면서도 자신을 아껴줄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찾는 모습이 내게는 진실하게 와닿았다.
그런 면에서 브루스와 레이첼, 하비의 과거와 관계는 훨씬 깊이 탐색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액션 장면 넣느라 그런 거 할 시간은 없었겠지. 좀 더 인물들의 인간적인 모습과 감정들을 보여주었으면 훨씬 마음을 끌어당기는 드라마가 되었을 텐데, 그 점은 아쉽다. 그래서 더욱 다크 나이트를 윤리극이라고 하는 것이고. 굉장히 끌리는 드라마를 암시는 하고 있지만 그쪽에 시간을 들이기보다는 도덕적 딜레마와 잿빛 지대를 보여주는 데 주력하니까.
어쨌든 스파이더맨 이래 느꼈지만 수퍼히어로 여자친구 (혹은 짝사랑 상대)는 목청 하나는 좋아야 하는 모양이다. 추락하면서 내지른 레이첼의 '꺄아악!'은 압권이었달까. (...) 구출해준 배트맨에게 '이거 또 하진 말죠'라고 한 대사는 장르의 전형에 대한 패러디 느낌이 강해서 유쾌했다.
7. 그들은 정말 그래야 했을까. 불의에 대한 열혈 싸움을 내가 그닥 좋아하지 않는 이유를 다크 나이트는 잘 보여주고 있다.
시하야님 글에서도 드러난 문제의식이지만, 기득권층에게 힘을 급격히 빼앗아가려는 노력은 그것이 도덕적으로 정당하든 아니든 부작용이 엄청나다. 그 강력한 사람들이 그냥 앉아서 홀랑 뺏길 것 같나. 반드시 싸움이 벌어지고, 희생자가 나게 마련이다.
비유하자면 공산주의 혁명과 복지국가의 차이 아닐까. 아무 규제 없는 자본주의에 말도 못할 끔찍한 불의가 많은 건 물론이다. 지금도 그런 게 많이 드러나고 있기도 하고. 하지만 그렇다고 나쁜놈들 끌어내리는 게 정말로 해결책인가? 그런 싸움은 또 그 자체의 불의를 일으키게 마련이고, 또 다른 절대 권력층을 세우기도 했다. 반면, 적을 잡아 없애는 데 주력하는 대신 경제적 구조를 정의롭게 바꾸고 중산층을 창조한 사회민주주의는 훨씬 평화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었다.
어떻게 보면 아무리 불의와 싸운다고 해도 싸움이 일으키는 혼란은 그 자체로 불의하다. 범죄조직이 도시를 장악한 상황에서 무턱대고 덴트는 법, 배트맨은 폭력으로 싸우려고 든 것은 도시를 정말로 구해내겠다는 합리적인 생각이라기보다는 싸우고, 이기고, 정복하라는 남성 호르몬의 부름에 대한 응답 아니었을까. 그래서 레이첼은 배트맨을 필요로 하는 것은 브루스라고 지적했겠지.
물론 악당이 활개를 치면 분한 건 맞고 저 나쁜 것들을 그냥 두면 안 되는 것도 맞는데, 곧이곧대로 맞서 싸우는 게 정말로 보통 사람들이 잘 사는 최선의 방법이었을까 싶다. 그런 싸움은 정말로 새우등 터지기 십상인 약자를 위한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분한 마음과 영웅심 충족일까. 어찌 보면 그것도 다크 나이트라는 윤리극의 중요한 질문이라면 질문일 수 있겠지.
8. 하비 덴트의 삶과 죽음: 밥 먹으며 승한군에게도 한 얘기지만, 하비 덴트는 어차피 피부 이식 수술을 거부하고 소독도 안한 3도 화상을 그대로 드러내고 다니면서 오래 살기 어려웠다. 화상의 가장 심각한 부작용 중 하나가 감염이고, 괴사도 일어났을 테니 어차피 그게 퍼져서 오래 못 갔을 거다. 승한군 얘기대로 레이첼 없이 살기 싫다, 죽기 전에 한풀이나 하자는 생각이었겠지.
덴트가 그 경찰 가족 인질로 잡은 장면에서 레이첼이 그의 가족이었다고 했듯, 그가 천애고아라는 점은 그 피부이식 거부 건에서도 드러난다. 그 정도 화상을 입었으면 치료 거부는 죽겠다는 소리인데, 가족이나 누가 있는 상황이었다면 정신 감정, 법원의 보호자 지명, 보호자의 치료 승인이 원래 과정이었을 거다. 하긴 뭐 도시가 난리가 나서 그럴 시간도 없었으려나.
사실 기왕 원작에서 벗어나는 김에는 나 같으면 덴트의 얼굴 반쪽은 그렇게 극단적인 화상 대신에 약간의 흉터와 긁힌 자국 정도로 처리했을 거다. 원작의 (그리고 영화의) 모습은 만화적 과장의 재미는 있지만 사실 레이첼의 죽음으로 드러난 또 다른 얼굴은 하비 덴트의 원래 얼굴과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 없으니까. 화상의 끔찍한 모습은 덴트의 광기를 이질적으로 만드는 역할을 한다. 사실 그렇게 이질적이지 않은데도. 극도의 정의감은 그 자체 하나의 광신이나 광기가 아닌가?
그래서 히쓰 레져급의 배우에게 하비 덴트 역시 맡길 수 있었더라면 심한 화상 분장 없이 마음을 쥐어짜는 투 페이스가 나왔으리라고 보지만, 우선 그런 배역을 하기도 어려운 데다 조커가 그렇게 카리스마 넘치는데 투 페이스까지 그러면 주인공이라고 하는 배트맨은 정말 설 자리가 없었을 테니 어쩔 수 없는 면도 있지.
9. 레이히 의원은 멋지다: 조커가 파티에 들이닥치는 장면에는 미국 상원 법사위 위원장인 민주당 패트린 레이히 (Patrick Leahy) 버몬트 상원의원이 까메오 출연했다. 학교 대선배고 얼마 전에 학교에 와서 강연도 했었는데, 연기가 필요없이 그냥 얘기하면 바로 용기와 위엄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분. 아래 클립에서 40초경부터가 레이히 의원 등장이다.
곁다리이지만, 아주 작은 것에서도 조커의 센스는 빛을 발한다. 클립 시작 부분에서 신사 (gentlemen)을 아주 약간 끝어서 말한 것만으로도 (gentle men, 얌전한 남자분들) 파티 손님들을 절묘하게 모욕하는 저 솜씨란.
10. 조커의 흉터: 얘기할 때마다 말이 바뀌는 흉터의 기원은 역시 조커가 스스로 그랬다는 게 답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유? 그런 게 왜 필요하삼. 자네 살기 싫은 모양이군? (...) 뭐 어쩌면 좋은 대화 소재라고 생각했을지도.
결론적으로 이것저것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 허점도 있지만 꽤 깊이가 있는 영화였다. 좋은 영화 보여준 승한군에게 감사를. 특히 애잔하고 공포스러운
의 기억은 오랫동안 남을 것 같다. 죽음과 우연 외에는 공평한 것이라고는 없는 세상 속에서 도시의 진창 한가운데를 뒹굴어야 하는 우리들의 표상이며 그림자. 아무리 진창이라도 쉽게 떠날 수도 없는 이 도시, 우리의 고담에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던져야 할지도 모르는 질문. Why so serio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