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는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 (Avatar)를 3D, 아니 의자까지 흔들어 주시고 얼굴에 물뿌려주는 4D로 봤다. 어차피 영화관 외에는 절대 볼 생각이 없으니 아침부터 속이 안 좋은 날이기는 했지만 부득불 가서 봤다. 아마 요즘 아바타 보기 어려운 게 다른 사람들도 나랑 비슷한 생각이라 그런 것 같다.

결론부터 말하면 후회하지는 않는다. 영상은 정말 수준급이었고, 실사와 애니메이션 입힌 실사가 기존의 컴퓨터 그래픽이나 외계인 의상과는 차원이 다른 경험을 선사했다. 외계인의 생김새는 워낙 실감나고 움직임은 너무나 부드러워서 아바타의 기술적, 시각적 완성도에 대한 찬사는 정말 이해할 만했다.

그러나 그 나머지는... (스포일러)


아바타의 영상이나 기술은 분명 훌륭하지만, 영화의 기술은 좋은 이야기를 전할 때 가장 빛난다. 기술이란 도구이며 수단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아바타는 기술적으로 높이 쳐줄 수 있지만 이야기로서의, 따라서 영화로서의 실패는 그 훌륭한 영상 때문에 오히려 더 두드러졌다.

아바타의 가장 긍정적인 영향은 영상기술의 놀라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바타의 상업적 성공은 기술개발과 투자심리를 촉진할 것이며, 그 결과 더 많은 3D 영화가 쏟아져나올 것이다. 많이 나오다 보면 그 중에는 명작도 있을 것이다. 아바타가 보여준 기술이 앞으로는 완성도 있는 이야기를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수단이 되기를 나는 바라고 있다. 기술에 현혹되어 진짜 재밌는 영화가 무엇인지 잊지 않는다면 분명 그렇게 될 것이다.
2010/03/19 12:37 2010/03/19 12:37
Posted by 로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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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 감독, 전도연 주연의 그 유명한 2007년작 영화 밀양 이야기를 이제서야 하면 유행에 뒤떨어지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것은 각오해야 한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나는 이 영화를 바로 최근에야 본 것을. 그리고 유행에 형편없이 뒤떨어지는 사람이라는 것도 사실이니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유행에 뒤처진 사람으로서 내가 뒤늦게 본 밀양 이야기를 풀어가도록 하겠다.

꽤 된 영화인지라 감출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지만, 혹시 안 봤다면 미리니름 (스포일러) 무지 많으니 이 글은 피할 것을 권한다.

영화 밀양은 고통이라는 쉽지도 편하지도 않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주인공 신애의 남편은 영화가 시작하기도 전에 죽었고, 아들 준도 그 아이가 신애에게 얼마나 소중했는지, 둘의 일상이 작지만 얼마나 행복했는지 보여줄 만큼만 시간을 차지한 후 일찌감치 죽으며 자리를 비켜준다. 누가 죽였는지 궁금해할 추적과 수사의 시간도 거의 없고, 사건에 대한 긴장감이나 반전도 없다. 그저 슬픔이 남을 뿐.

시간과 극적 공간을 채울 만한 나머지를 깔끔하게 걷어낸 후 나머지 영화는 온전히 신애의 몫이다. 그녀가 고통에 멍해있고, 몸부림치고, 작은 빛을 찾아 필사적으로 파고들고, 다시 절망하고, 절규하는 모습으로 나머지 영화를 채워가면서 견딜 수 없는 상실을 겪은 한 인간의 고통과 회복이라는 문제를 끈질기게 추적한다.

그래서 오직 한 사람의 고통을 쫓는 이 영화는 전도연이라는 배우가 없으면 성립하지조차 않는다. 전율이 일 정도로 섬세하면서도 선이 굵고 과감한 그 연기가 없었으면 밀양은 최악으로 시시한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동급의 상대역도, 로맨스나 스릴러, 법정 드라마 등다른 장르적 재미도 일체 없는 영화를 채워가는 전도연의 몫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버겁지만, 그녀는 그 도전 앞에서 갈고 다음은 보석 같은 연기로 최고의 경지에 오른 장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 그녀에게 칸느상은 부족하다 싶을 정도이다.

전도연의 그 연기력 때문에 관객은 (영화 시간이 남은 것은 차치하고라도) 신애가 갑자기 기독교인이 되었을 때 그것으로 그녀의 고통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을 마음에 받아들이고 구원을 받았다는 신애의 웃음은 진실하지 않고 불안하다. 자기 안의 심연을 들여다볼 수가 없기에 고통에서 신에게로 도피하는 그녀의 속내를 어색한 웃음은 그대로 보여준다.

신애의 웃음이 어색한 만큼이나 같은 교인들의 태도도 지나치게 즐겁고 일상적이다. 마치 신애가 아들이 살해당한 것이 아니라 기르던 개가 차에 치이기라도 한 듯이, 신을 믿으면 그 모든 아픔에는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것처럼 신애를 포함해 그들은 그녀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지 않고, 구원받았으니 이제 고통 끝 행복 시작이라고 필사적으로 말한다.

그러한 고통의 부정과 외면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나는 종교만으로 신애가 고통에서 구원을 얻지 못한 것이 종교나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너무 엄청난 현실에 마주하면 도피하고 외면하고 싶은 인간 본성의 정직한 자화상일 뿐이지, 신애를 도우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한 그 정직하고 선량한 사람들만의 잘못이 아니다.

신애와 동료 교인들이 그녀가 겪은 상실과 분노의 검은 구덩이를 화사한 종교적 장식으로 덮으려고 애쓴 것이 공감이 가는 이유가 또 있다. 신애도 알고 있었고, 다른 교인들도 느끼고는 있었을 것이다. 고통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신애는 미친다는 것을. 신애는, 그리고 주변 사람들은 고통의 심연에 도사린 광기에서 그녀를 구하려고 필사적으로 아름답고 숭고한 종교극을 연출했다.

그 외관에 금이 간 것은 신애가 아들을 죽인 범인을 반대를 무릅쓰고 용서하러 간 면회장면부터이다. 신애의 하나님에게 용서받아 너무나 마음이 편하다며 평온히 웃는 그를 보며 이건 뭔가 아니라고 느낀 것은 나와 신애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슨 짓을 해도 용서를 빌면 그만이라는 값싼 구원의 모순에 직시하면서 종교극의 무대는 유지하기 어려워진다.

사실 아무리 용서를 받았다고 해도 어린아이를 유괴하여 죽인 살인자가 마음 편하게 잘먹고 잘 산다는 게 말이 되는가? 진짜 회개는 그런 게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정말로 회개했다면 그런 짓을 저지르고 마음이 편해서는 안 된다. 매일같이 괴롭고,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속죄해야지, 죄가 아무것도 아닌양 길가에 내던지고 이제 난 평화를 찾았다며 유들유들한 얼굴로 미소짓는 것은 회개가 아니다. 예수가 실제로 한 말씀만 봐도 알 수 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8장 9~14절)
결국 유괴범의 신앙은 신애의 신앙을 일그러진 거울처럼 비추고 있었다. 신애가 고통에 직면하는 대신 종교로 가렸듯, 유괴범도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죄책감에 마주하는 대응물로 종교를 이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거대한 기만 앞에 종교극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면서 아픔의 검은 심연에서는 차가운 광기의 바람이 불어온다.

고통을 한 꺼풀 가린 종교의 장막을 걷으면서 영화는 그나마 종교적 구원 영화로 편하게 빠질 수 있는 마지막 장르적 출구조차 외면하고 주제의식 탐색의 극단을 향해 질주한다. 추적, 복수, 사랑, 신앙 그 어느 하나의 명쾌한 답도 없이 채 영화는, 그리고 신애는 훨씬 더 복잡하고 어려운 여정을 걷는다.

어떻게든 피하고 외면하려고 했던 고통의 밑바닥은 역시나 유쾌하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그곳은 어둡고, 복잡하고, 더럽고, 추하다. 그러면서도 부흥회에서 '거짓말이야'를 트는 장면에서처럼 통렬한 웃음을 잊지 않는 감각에 이창동 감독과 극작가에게 경이를 표하는 바이다. 미로처럼 출구가 보이지 않는 답답한 길 위에서, 견딜 수 없는 신애의 아픔과 분노에는 어떤 쉬운 해답도 없다.

신애는 목숨은 건지고 치료를 받지만, 멋진 의사선생의 말 한 마디에 울음을 터뜨리며 깨달음을 얻는 의학드라마조차 피한 영화 속에서 그녀의 회복은 여전히 길고 어렵고, 결국 불완전할 것이라는 짐작은 쉽게 할 수 있다. 상실의 아픔은 끝끝내 안고 갈 짐이라는 것을, 구원은 어느 순간 쏟아지는 광휘가 아닌, 아무리 아파도 묵묵히 걷는 가시밭길이라는 것을.

그럼에도 신애에게 전도했던 약사가 신의 뜻이 깃들어 있다고 한 그 햇살은 어디에나 숨어있다. 우리가 딛고 사는 땅, 숙명처럼 상실을 겪은 여자가 잘라낸 머리칼이 흩어지는 그 흙 위에도 따사로운, 은혜로운 햇살은 깃든다. 생각만 해도 벅찬 회복의 여정을 묵묵히 걷는 신애의 포기하지 않는 정신 속에, 신애 말대로 인테리어를 바꿨더니 손님이 늘었다고 좋아하는 이웃의 웃음 속에, 눈길 하나 주지 않아도 그녀를 쭐레쭐레 쫓아다니는 노총각의 헌신 속에, 인간이라는 연약하고 때로 추악한 존재 속에는 작은 햇살이 숨어있다. 버거운 슬픔 앞에 그 온기는 불완전한 해답이지만, 때로는 유일한 해답이기도 하다. 고통의 끝에서 붙잡을 수 있는 것은 그 작고 보잘것없는 희망밖에 없기에.
2009/12/26 13:21 2009/12/26 13:21
Posted by 로키
Mr. Smith Goes to Washington의 한 장면

항의편지를 쥐고 망연자실한 스미스

언론법과 집시법에 대한 논의를 보면서 나는 1939년 미국 영화 '워싱턴에 간 스미스씨 (Mr. Smith Goes to Washington)'를 떠올린다. 정치와 아무 상관없이 살아오던 젊은이 제퍼슨 스미스 (제임스 스튜어트 분)가 얼떨결에 상원의원이 되어 워싱턴의 위선과 부패에 맞서는 내용인 이 영화는 언론 독과점과 시위의 자유 문제 역시 극적으로 다루고 있어서 특히 시의성이 있다. (스포일러가 싫은 분은 다음 문단은 건너뛰길)


영화 속에서 부패의 누명을 쓰고 상원에서 제명당할 위기에 처한 스미스는 동료 의원의 부패를 폭로하고 오명을 벗으려고 외로운 싸움을 시작한다. 영화의 악역이자 부패의 배후인 짐 테일러는 (에드워드 아놀드 분) 스미스의 출신 주에서 모든 신문과 방송을 장악한 재벌이다. 테일러는 자신이 소유한 언론사에 지시해서 스미스를 부패한 의원으로 힐난하는 보도를 대대적으로 시킨다. 스미스에 대한 진실을 알리려고 전단지를 찍고 거리에 나선 소년들의 시위는 폭력적으로 진압당한다. 그 결과 스미스가 대표하는 주민들은 스미스가 잘못이라고 굳게 믿어버리고, 그를 비난하는 엄청난 양의 우편물이 의회에 도착한다. 이미 신체와 정신이 한계에 달한 스미스는 그 편지들을 보고 무너지듯 쓰러진다.


언론 독과점과 집회와 시위의 자유 제약이 민주주의에 치명적인 이유를 '워싱턴에 간 스미스씨'는 아주 단순하고도 강렬하게 보여주고 있다. 자유가 형식적 자유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것은 중학교 역사 교과서만 봐도 안다. 실질적으로 존재하는 힘의 불균형을 국가에서 어느 정도 바로잡지 않으면 권력과 재력을 독점한 일부는 가히 전제적인 권력을 휘두를 수 있으며, 나머지는 죽을 자유 정도밖에 남지 않는다. 그래서 현대 민주국가라면 노동자들이 노조를 조직할 권리, 미성년자 노동에 대한 규제, 노동시간과 조건 제한 등을 법으로 정하고 있게 마련이다. (노조 결성권은 우리나라에서는 헌법으로도 규정하고 있다.) 누구든지 자유롭게 계약할 수 있다는 형식적 자유가 평범한 시민에게 얼마나 억압적이고 비참한지는 역사가 알려주고 있으니까.

언론의 자유도 마찬가지이다. 누구든지 자유롭게, 얼마든지 언론사를 차릴 수 있다는 형식적 자유는 현실적인 재력의 불균형 때문에 언론 독과점을 사실상 조장한다. 누구든지 자유롭게 근로 계약을 맺을 수 있다는 형식적 자유가 노예제나 다름없는 상황을 조장했듯이. 일부 돈이 있는 개인이나 집단이 언론을 모두 장악하면 '워싱턴에 간 스미스씨'에서처럼 언론을 통해 드러나는 진실이란 극히 일부의 전유물이 된다. 민주주의의 근본인 다양한 시점과 의견이 자유롭게 경합하는 시장을 말살하는 그런 형식적 자유는 이미 민주주의가 아닌 귀족정이다.

대통령이라고 이런 간단한 역사적 사실을 모를 리 없다. 아니, 오히려 너무 잘 아니까 그런 입법을 무리하게 추진하고 있다. 그와 그들이 원하는 사회는 민주사회가 아닌, 힘있는 이들 몇몇만을 위한 사회이니까. 불편한 저항과 다양하게 불거져 나오는 반대의견을 비애국적이라거나 친북이라거나 좌파라거나 하는 단순한 이름으로 일축할 수 있는 깔끔하고 일사분란한 사회가 그들의 이상향이니까. 국가과 재벌이 손잡고 점점 불평등하고 비민주적인 사회를 만들어가는 군국주의로의 회귀야말로 그들의 영원한 꿈이다. 반대를 두려워하고 다양성이 싫은, 상상력이 메마르고 지적으로 빈곤한 불쌍한 자들이 구하는 위안이 우리 모두의 현실이 되어간다는 사실이 두려우면서도 우습다.

그래서 지금 내 블로그에는 표현의 자유가 눈이 내린다. 이 긴 밤이 얼마나 갈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고 미약한 등불을 들어보인다. 남들도 볼 수 있게, 같은 불빛을 보고 불안한 마음을 위로받을 수 있게, 그리고 어쩌면 참 멀어만 보이는 그 여명을 불러들일 수 있도록. 터벅터벅 서울로 걸어가는 스미스씨의 지치고 외로운 뒷모습 위로는 우리 모두의 염원이 조용히 눈이 되어 내린다.
2008/12/27 15:26 2008/12/27 15:26
Posted by 로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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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는 픽사르와 디즈니의 매우 성공적인 합작의 또 다른 결과물인 월리 (Wall-E)를 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극찬했던 대로 상당히 괜찮고 생각할 거리가 많았다. 기계에서 인간보다 인간다운 감정을 끌어낸 디자인부터 시작해 성장과 용기라는 쉽지 않은 주제를 다정다감하게 다루어낸 대본까지 '월리'는 상당히 뛰어난 작품이다.

more..

2008/11/26 00:36 2008/11/26 00:36
Posted by 로키
화제작(?) 다크 나이트를 봤다. 기법상 굉장히 세련되게 잘 찍은 영화고, 모든 사람이 입을 모아 말하듯 조커의 연기는 압권이었다. 이래서야 히쓰 레져가 사후 남우조연상 수상 못했다가는 아카데미 욕 바가지로 먹을 듯. 아니, 그 영화에서의 비중을 보면 주연일지도 모른다. (...)

다크 나이트는 근본적으로는 복잡한 윤리극이라고 생각한다. 끝없이 도덕성을 두고 고민시키고, 딱히 떨어지는 답 없이 많은 해석의 여지와 그늘을 남긴다. 하지만 결국 수퍼히어로/헐리우드의 한계를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해서, 특히 끝에 가서 너무 친절하게 포장해서 먹여준 주제의식과 배트맨 우러르기는 좀 별로였다.

이런저런 생각들 (스포일러)


결론적으로 이것저것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 허점도 있지만 꽤 깊이가 있는 영화였다. 좋은 영화 보여준 승한군에게 감사를. 특히 애잔하고 공포스러운 조커의 기억은 오랫동안 남을 것 같다. 죽음과 우연 외에는 공평한 것이라고는 없는 세상 속에서 도시의 진창 한가운데를 뒹굴어야 하는 우리들의 표상이며 그림자. 아무리 진창이라도 쉽게 떠날 수도 없는 이 도시, 우리의 고담에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던져야 할지도 모르는 질문. Why so serious?
2008/09/06 23:34 2008/09/06 23:34
Posted by 로키
The Business of Being Born

영화 포스터

어제는 '태어난다는 일' (The Business of Being Born)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넷플릭스에서 봤다. 제목 그대로 출산을 소재로 한 영화인데, 특히 미국 산부인과에서 정상적인 출산에 하는 의학적 개입을 비판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도 해당이 많지 않나 싶다.

난 사실 여자답다는 소리는 별로 못 듣고 산다. 영화를 볼 때도 연인의 슬픈 이야기에 눈물 흘리거나 감동받는 일은 거의 없다. '저것들, 저러다가 또 몇 개월 지나면 멀쩡할 텐데.' (심드렁~) 그런 내가 정말 감동먹는 건 주로 부모와 자식 이야기다. 영화나 책을 보다 부모의 애틋한 마음이 전해질 때면 눈물이 왈칵 쏟아지곤 하고.

어제는 저 다큐멘터리 보면서 눈물을 서너 번 펑펑 쏟았다. 아이를 자연분만하는 모습이 나올 때였는데, 엄마가 죽도록 힘든 진통을 거쳐 마침내 꼬물꼬물 아기가 태어나는 순간 얼마나 감정이 복받치는지. 아씨, 생각하니까 또 눈물 나네. 애를 낳아본 일도 없는데 여자라서 그런 것일까, 인간이라서 그런 것일까, 엄마 생각이 나서 그런 걸까. 진부한 말이지만 생명 탄생의 감동은 당사자가 아닌 관객인 나에게도 참 형언하기 어려웠다.

반면 산부인과에서 아이를 낳는 모습에는 감동이 아니라 공포가 먼저 느껴지더라. 경막외 마취를 하느라 산모 척추에 주사를 놓는 모습이라든지 (으앙 으앙 으앙 으앙 으앙), 누워서 억지로 크게 벌린 다리 사이로 의사와 간호사들이 의료도구를 들고 우르르 몰려있는 모습이나, 제왕절개... 으악, 제왕절개!!! 우욱. 그게 다 연출의 힘인지는 몰라도, 봐서 끔찍하게 느껴지는 건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자연분만을 하는 모습에서 느낀 것이 고통을 이겨내는 강한 의지, 그리고 스스로 출산하는 여성의 힘이었다면 산부인과에서 아이를 낳는 모습에서 느낀 것은 철저하게 의사의 지시만을 따르는, 결정권을 빼앗긴 채 수동적이고 거의 기계적인 산모의 모습이었다. 기억에 남는 말 하나: "현대 의학은 여자에게 당신은 아이를 낳을 줄 모른다고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The Business of Being Born
물론 병원에서 아이를 낳는다고 출산의 가치가 덜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영화에서도 집에서 자연분만을 하려다가 아이가 거꾸로 되어 있어서 급히 병원에 가 제왕절개를 받는 이야기가 나오는 등, 옛날이라면 목숨을 잃었을 산모와 아이를 구해낸 현대 의학의 공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건 출산은 병이 아니라는 거다. 비정상적이거나 위험한 출산 상황에서 확실히 의학적 개입은 빛을 발하지만, 어째서 정상적인 출산에까지 개입을 해야 하는가? 기본적으로 병리와 위험을 예정하는 의학의 개입이 정상적 출산까지 위기상황으로 몰아가며, 산모와 아이에게 악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을 영화는 꽤 효과적으로 펼치고 있다.

영화를 보면서 내가 분노했던 부분. 진통이 일정 시간 이상 길어지면 병원에서는 산모에게 피토신이라는 인공 옥시토신을 투입한다. 왜? 진통이 너무 길어지면 제때 침대를 비울 수가 없어지거든. 기본적으로 사업인 병원에서는 스케쥴 조절을 위해 진통의 길이마저 맞추는 것이다. 피토신은 강하고 긴 자궁 수축을 유도하므로 이게 심해지면 또 늦추려고 경막외 마취를 한다. (척추에 주사 싫어 우아앙) 그러면 이번엔 또 너무 수축이 늦어져서 피토신, 이번엔 빠르니까 마취...

그러다가 결국 자궁 속에서 이리 눌리고 저리 눌린 아기가 위험해지면 제왕절개를 하고 아, 이 위대한 현대 의학이여 하며 자축한다는 거지. 애당초 개입하지 않았으면 대부분 자연분만으로 끝났을 정상적인 분만을 굳이 위기로 몰아가고서 말야. 게다가 제왕절개는 돈도 더 되고 빨리 끝나는데 의사 입장에서는 안할 이유가 어딨나. 그리고 아이를 구하려고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는 방어가 되는 법적 이유까지 있다. 그런데 그 속에 정작 산모와 아이의 복지가 끼어들 틈은 어디 있지?

게다가 흔히 아이를 낳는 자세 하면 등을 대고 누워서 다리를 위로 벌리는 걸 생각하는데, 사실 이 자세는 출산 자세 중에서도 최악이라고 한다. 등을 대고 누우면 아기가 나와야 하는 골반은 오히려 좁아지고, 또 골반의 움직임이 있어야 아기도 쉽게 나오는데 움직임을 제약하니까. 사실 이 자세의 진짜 편의는 산모나 아이가 아니라 의사에게 있다. 훨씬 편하고 자연스러운 자세인 쪼그려 앉는 자세하고 비교하면 쉽게 알 수 있지.

정상 분만을 도와줄 사람이 의사가 아니라면 그 대안은 무엇일까? 바로 어느새 사극에나 나올 것 같은 말이 되어버린 산파라고 영화에서는 주장하고 있다. 유럽과 일본에서는 대다수의 출산을 산파가 돕고, 네덜란드는 출산의 1/3을 집에서 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영아사망률은 95%의 출산을 병원에서 하는 미국보다 훨씬 낮다. (미국의 영아사망률은 산업국가 중 최악 수준이라고 한다. 우리는 어떨까 모르겠네.)

내가 보기에도 비상시에 의사의 도움을 빨리 받을 체제만 되어 있다면 '병을 고치는' 개념인 의사보다는 '애 낳는 걸 도와주는' 산파가 정상적인 분만을 예상할 수 있는 산모에게는 훨씬 합리적인 선택이 아닌가 한다. 결국 의학의 역할은 위험할 때 개입하는 거지 출산을 주도하는 게 아니니까. 의사라는 게 있기 전에도 애 낳고 살았거든? 여자들이 아이를 낳는 그 기적적인 순간, 자기 신체에 대한 결정권을 잡는 것이야말로 진짜 여성해방 아니겠는가.

덧: 내가 또 울었던 때라면 (그때는 분노였지만) 미국에서 낙태의 자유를 대폭 축소한 법을 합헌 선언한 Gonzales v. Carhart 결정을 읽었을 때였다. 난 출산을 보면 감동에 겨워 눈물을 흘리며, 낙태의 자유를 100% 지지한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 어떤 모순도 없다고 생각한다.
2008/03/06 06:21 2008/03/06 06:21
Posted by 로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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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바라 스트레이샌드와 로버트 레드포드 주연의 옛날 영화 '우리 옛날 모습처럼' (The Way We Were)을 봤다. 원래 연애 영화 잘 안 보는데, 줄거리 소개에 보니까 스트레이샌드가 맡은 역의 케이티가 좌파 운동가이고 극중 두 사람이 결국 깨진 이유가 50년대 맥카시 파동이라고 나와서 날름 낚였다지. 내가 또 보수와 진보의 충돌 얘기라면 사족을 못 쓰거든.

스포일러 보기.

2007/11/26 13:32 2007/11/26 13:32
Posted by 로키
귀국 비행기에서 영화를 세 편 보았다. 정확히는 두 편을 보고 한 편은 보다가 포기했으니 2.5편쯤 봤다고 해야 할까. 이워 지마에서 온 편지 (Letters from Iwo Jima), 인간의 아이 (Children of Men), 드림걸즈 (Dreamgirls) 순서였다. 그 얘기를 하자면...

스포일러! 미리니름! 네타바레! 보기


2007/06/05 18:41 2007/06/05 18:41
Posted by 로키

크래쉬?

2007/03/12 05:24
인종문제를 다룬 2005년작 영화 크래쉬 (Crash)를 DVD로 본 소감은... 으쓱. 잘 만든 영화긴 하다. 기술적 완성도도 높고, 연기도 대체로 좋고. 역시 무거운 소재를 다룬 군상극인 '매그놀리아'나 '트래픽' (구도는 좀 다르지만 '히트' 역시)의 계보를 잇는 야심작으로 보이지만 감동은 좀 덜하다. 어떤 부분에서는 인물의 사연이나 동기에 대한 조명이 부족했고, 어떤 대목에서는 '지금 관객 갖고 노냐?' 소리가 절로 나오더라. 기교는 좋되 뭔가 허한 영화.

스포일러다.


그럭저럭 재밌게 본 영화긴 하다. 하지만 묘하게 신경을 긁는데가 있고, 결정적인 부분에서는 좀 부족한 작품. 생각없이 보기엔 나쁘지 않다.
2007/03/12 05:24 2007/03/12 05:24
Posted by 로키

파리넬리

2006/11/22 03:48

편지: 드디어, 파리넬리.

오늘밤 우리의 오랜 대립이 끝을 맺는구나.

신 앞에서 우리의 빚을 정산하자.

두 사람의 소년기에 형이 약속한 오페라를 기억하는가?

그가 얼마나 흥분하며 오페라 이야기를 했는지?

그것이 네 거세의 고통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그의 울부짖는 양심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는지

의문을 가진 적이 있었는가?

핸델: 이제 진실을 직시할 때가 왔다.

유년기부터 너를 괴롭혀온...

알고 있었으면서 어째서 외면하는가?

너를 거세시킨 형에게 재능을 바쳐왔음을.

형제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핸델의 얼굴에 침을 뱉었지.

네가 당한 것과 같은 짓을 나에게 했구나.

나의 상상력을 거세했어.

나는 다시는 오페라를 쓰지 않을 것이다.

너에게 처음 알리는 것이며, 오로지 너의 책임이다.

나에게 빼앗은 노래를 끝까지 부를

힘을 달라고 신께 기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파리넬리.

Farinelli Il Castrato (카스트라토 파리넬리)는 제목 그대로 18세기의 유명한 카스트라토 까를로 브로스키, 예명 파리넬리의 이야기를 영화화한 것이다. 다큐멘터리가 아닌만큼 뭐, 허구적 가공은 필연적으로 들어갔지만. 아이팝에서 공짜로 해주길래 보느라 밤늦게까지 감동먹었던 영화이다. (시하야님도 끌어들여서 둘이서 MSN으로 수다떨면서 봤다는 전설이..) 수려한 영상과 아름다운 노래, 배신과 증오를 뛰어넘는 예술혼과 사랑, 마지막에는 용서와 화해로 이어지면서 줄곧 사람을 놔주지 않는 감정선...

특히 한참 옛날 노래들인데도 파리넬리가 초기에 불렀던 형의 노래들과 나중에 핸델의 노래를 부를 때의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특별히 클래식에 정통한 것도 아닌데도 기교만 부리고 가벼운 곡과 진중한 감동을 주는 곡은 내가 듣기에도 차이가 났다. 영화에서 핸델이 파리넬리의 적수로 나오지만, 그러면서도 파리넬리의 목소리를 진정 해방시켜준 것도 핸델이었다는 것은 참 역설적.

Venti, Turbini (바람이여, 회오리여) - 1절

Di speranza un bel raggio
Ritorna a consolar l'alma smarrita;
Sì adorata mia vita!
Corro veloce a discoprir gl'inganni;
Amor, sol per pietà, dammi i tuoi vanni!

희망의 서광이 다시 한번
내 요동치는 영혼에 비추게 하라
사랑하는 이여!
나를 기만한 자들을 치러 이제 달려가니
사랑의 큐피드여, 불쌍히 여기어 날개를 달아주오!

카스트라토란 참 여러가지 면에서 경계를 넘나드는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남자가 입을 여니까 소프라노 목소리가 나오는데 한편으로는 소름끼치면서도 얼마나 멋진지... (영화의 목소리는 낮은 소프라노와 테너를 합성했다고 들었다.) 카스트라토가 거세된 남자이면서도 의심의 여지 없이 '남자'라는 점이라든가, 생식력이 없으면서도 성욕도 있고 여자들이 따르는 점이라든지..  (실제로 성욕 자체는 적을지 몰라도 거세된 남자들도 발기도 되고 다 되는 걸로 알고 있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존재가 있을 때 그의 주변에서는 끝없는 갈등과 변화, 경계의 재편성이 있게 마련이다. 파리넬리가 바로 그렇다.

카스트라토의 역사는 의외로 19세기 후반까지도 이어져서, 가장 늦게까지 유지했던 이탈리아가 1870년에 법으로 금지했다. 1902년 레오 13세의 포고로 영원히 교회 음악에서 카스트라토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고 교회에 마지막으로 남았던 카스트라토 알레산드로 모레스키가 1913년 떠나갔으니, 카스트라토가 사라져 간 것은 아주 옛날 일도 아닌 것이다.

Venti, Turbini - 2절

Venti, turbini, prestate
Le vostre ali a questo piè!
Cieli, numi, il braccio armate
Contro chi pena mi diè!

바람이여 회오리여, 나의 발걸음에
그대들의 날개를 빌려주오
하늘이여 신들이여, 나의 팔을 강하게 하소서
나에게 고통을 준 자들에게 대적하도록!

현대에는 매우 드물게 거세 없이 호르몬관계가 비정상인 카스트라토나 특수훈련을 받아 카스트라토 음역을 내는 가수는 있을지 몰라도 음악을 위해 어린 소년을 거세하는 야만적인 풍속은 사라졌다. (그렇게까지 해도 가수로 성공하는 비율은 극히 낮았다는 점이 또 비극이지만...) 실제로 당시에 카스트라토를 위해 작곡된 곡 중에는 오늘날에는 공연이 불가능한 것도 있다고 들었다.

그럼에도... 비록 잔혹한 야만성의 산물이지만 파리넬리와 같은 위대한 예술가의 목소리를 듣고 그 아름다움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카스트라토를 부자연스러운 존재라고 혐오한 영화 속의 핸델마저도 결국에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으니. 비인간적 풍속이, 인간의 이기심이 만들어낸 천상의 목소리는 그 고통의 깊이 때문에 더욱 아름다운 것일지도 모른다. 마치 진흙 속에 피어난 연꽃처럼...


Lascia ch'io pianga (울게 하소서)

Lascia ch'io pianga mia cruda sorte,
E che sospiri la libertà.

Il duolo infranga queste ritorte
De' miei martiri sol per pietà.

울게 하소서
나의 고통스런 운명에
한숨으로 나는
자유를 갈구하나니

이 고통으로 인하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어
이 환난의 사슬이
끊어지기 간구하나이다
2006/11/22 03:48 2006/11/22 03:48
Posted by 로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