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중엽에 파리에서 정기적인 장이 서기 시작하면서, 이 무렵의 사람들은 신선한 버터나 유제크림, 굴과 연어, 산딸기 등을 즐겨먹었다. 이 때 카바레가 대도시에 생겨났고, 가정 이외의 장소에서 식사하는 풍습이 생겨났다. 16세기 말 부르봉 왕가의 앙리 4세가 즉위했을 무렵, 위그노 전쟁의 결과 때문인지.. 어느 지방의 문서에는 ‘여윌대로 여윈 마을 사람들은 셔츠도 신발도 없고, 살아있는 사람들보다 무덤에서 나온 송장들 같았다’ 라고 기록되었다. 그와 중농주의자로 알려진 쉴리 공 등은 전쟁으로 황폐해진 농촌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 당시 새로 정착된 식습관문화에 따라 사람들은 11시나 정오경에 아주 늦게 조반을 먹기 시작했다. 또한 식탁의 장식이 더욱 화려해지고 부르주아층에서 은제식기가 유행하기 시작하여, 빵도마가 점점 식탁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앙리 4세는 도기 공장을 짓고, 은제식기 대신 도기를 사용하라고 권고했다) 독극물 방지용으로 사용하던 접시 위에 덮던 뚜껑은 음식이 식는 것을 막기 위해 계속 사용되었고, 1인용 스푼과 함께 흑단이나 상아 손잡이가 달린 칼이 식탁 위에 가지런히 놓였다. 한 차례의 상차림이 끝날 때마다 식탁보와 냅킨을 새로 깔았는데, 주인의 부를 간접적으로 상징하는 것이었다. <최초의 냅킨은 모직으로 만들어졌으며, 주로 입을 닦는데 사용되었다. 손이나 어깨 위에 올려놓고, 식사 전후에 한 차례씩 입을 닦았다. 이후 랭스지방의 아마포로 만든 천이 서서히 유행했고, 예의 러프가 유행하던 시기에 목에 거는 습관이 생겼다가, 17세기에 오늘날처럼 무릎에 올려놓게 되었다>
칠면조 요리가 새롭게 선을 보였고, 연어 같은 고급 생선요리라든지, 개구리나 달팽이 요리도 귀족들의 식탁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참고로 영국사람들은 13세기부터 이런 개구리를 잡아먹는 것을 질색했고, 노골적으로 프랑스인들은 개구리를 잡아먹는 이들이라고 비꼬았다> 파티스리는 단 과자이기보다는 고기와 야채를 넣은 파이를 의미했다. 디저트로는 치즈와 신선한 과일 또는 잼으로 조린 과일이나 익힌 과일이 나왔다. <설탕을 잔뜩 넣은 달디 단 과자를 내놓기에는 너무도 귀하고 비쌌다. 루이 14세 치세까지만 해도, 오직 약제사들만이 공식적으로 설탕을 판매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 설탕은 의약품으로 취급되었고, 상자에 넣고 자물쇠로 잠궈서 보관할 만큼 가격이 엄청나게 비쌌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어로 설탕이 없는 약제사라는 말은 가장 중요한 것이 결핍된, 즉 살 만한 물건이 없는 상점이나 직업을 가르키는 의미로 오랫동안 통용되었다. 설탕이 오늘날과 비슷한 역을 시작한 것은 커피와 초콜릿이 등장하면서부터다. 덧붙여서 그 당시의 꿀은 설탕에 비교해 서민들도 쉽게 구할 수 있는 편이었고, 싸고 풍부해서, 오늘날 설탕과 비슷한 역을 했다> 또한 앙리 4세의 의사 조제프 뒤셴느가 질색할 만큼 당시 사람들은 폭주를 즐겼다. 궁정에서는 거품이 일지 않는 상퍄뉴의 적포도주와 오를레앙산 포도주를 대량으로 즐겨 마셨다.
17세기에 이르러서 식생활과 내용은 크게 달라지게 된다. 이 시대의 요리 골자는 음식의 자연스러운 맛을 최대로 살리자는 것이다. 중세의 가장 대표적인 향료로 정향, 육두구향, 갈색 후추, 계피를 꼽을 수 있으며, 후추의 사용량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17~18세기 요리책에서 후추가 차지하는 비중은 20% 정도로, 사프란 향처럼 아예 요리책에서 사라진 향료도 있었다. (18세기 백과사전에서는 스페인 사람들은 그냥 놀며 빈둥거리는 것만큼 바닐라 향을 좋아한다고 비꼬기도 했다) 여전히 남아있는 향료로는 과자나 럼에 설탕, 레몬, 뜨거운 물을 탄 그로그란 음료에 넣는 계피와 생강을 들 수 있다. 1688년에 간행된 한 이탈리아 요리책은 그 때까지 전통적으로 사용되던 향료의 대부분이 레몬즙으로 대체되었다고 기술했다. (대체된 원인은 항료에 대한 판로가 개척되어, 가격이 하락하기도 했을 뿐더러, 흔해진 향료를 대신할 커피나 차, 초콜릿, 담배와 술 등의 사치품목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향료가 사라진 자리에 들어앉은 것은 다름아닌 그들의 선조가 빈자들의 향료라고 무시했던 요리용 풀들이나 국소적인 양념, 겨자였다. (중세 때, 풀이나 채소, 구근식품 등은 귀족의 식단이나 장부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다.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수프의 재료로 쓰이는 이 요리용 풀들은 가난한 이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중세의 의사들은 섬유질이 많아 소화하기 힘들기 때문에 거칠고 질긴 농민의 위장에나 어울리는 음식이라고 인식했다고 하며, 그 이유를 들며 귀족들에게 채소를 멀리하라고 권고했다) 과거에 비해 식초나 소금에 절여 보관하던 음식, 건조 훈제식품의 소비가 많이 줄게 되었고 (훈제된 생선, 특히 청어는 고기보다 훨씬 가격이 저렴할 뿐더러, 종교적으로 고기를 먹지 못하는 시기에 유일하게 허용되던 동물성 식품이었기에 대중의 애호를 받았다), 중세의 이중식 요리법(예를 들어 고기의 맛을 부드럽게 하면서, 동시에 국물도 얻기 위해, 고기를 굽기 전에 물에 넣고 오랫동안 푹 삶거나 끓인 것이라든지)도 서서히 자취를 감췄다.
이 당시에는 교통 수단이 개량되었고, 마차나 우차가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도로가 많이 증가했다. 그것은 자기 집에서 멀리 딸어진 지역의 산물을 식탁에 금방 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리라.소금에 절인 생선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치부되었고, 산지에서 막 도착한 생선이 새로운 요리법에 부응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보르도, 부르고뉴, 상파뉴 지방의 최상급 포도주의 질과 소비가 동시에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송비는 비싼 편이어서 대도시로 운반된 식품의 운송비가 원가를 뛰어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결국 귀족들만이 즐길 수 있었다. 귀족 이외에도 경제적으로 유복한 일부 계층에서 혼합곡을 사용해 만든 갈색 빵이나 거친 흑빵 대신 밀가루로 만든 희고 부드러운 빵을 선호했다. 18세기에 이르러 프랑스의 요리는 중세, 이탈리아 르네상스 요리의 영향에서 벗어났다. 장 자크 루소와 같은 이들은 자연으로 돌아갈 것을 설파하는 동시에, 지나치게 서민적이라고 기피되던 채소를 찬양했다. 또한 그들은 야채수프, 사라다, 고기 파이에 채소를 넣는 것 등을 강조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