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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mmentAuthororches
    • CommentTimeOct 21st 2007 편집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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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 사가 몬타나리의 견해에 따르면.. 유럽 남부에서는 대체로 빵과 포도주, 기름(올리브 유), 북부에서는 고기와 맥주 등이 주음식으로 꼽히는데, 기독교와 원시 게르만 전통의 아래, 대략 서기 3세기 경에 풍요와 기근을 헤아릴 수 없이 반복하면서 오늘날과 같은 유럽인의 골격이 잡혔으며, 사치스런 고급요리가 사회적 위신이나 권위를 나타내는 것이 확립된 것은 중세시기였고, 17세기 초까지도 이런 중세적 취향이 요리에 반영되었다고 한다.

    상류사회와 무관한 18세기의 농민 식사를 살펴보자면, 중세 때와 별로 변하지 않았다.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중세의 기본적인 음식은 빵과 뜬 숯불에 오랫동안 뭉근히 데워진 수프, 발효주인 포도주와 대체로 집에서 빚은 시드르라 불러진 능금주였으며, 가끔 고기나 달걀이라든지, 유제품 중 치즈를 곁들어 먹기도 했다. 비교적 부유한 시골 농가에서만 고기와 야채를 넣고 푹 끊인 수프가 식탁에 자주 등장했다.이들에게 굶주림은 매우 친숙한 관행이었고, 대개 잠두나 도토리를 넣은 거친 흑빵과 조잡한 포도주가 주된 식사였다. <왕의 생일에 빈민들에게 빵을 나누어주는 것은 오래된 관습으로, 대부분 누룩이 없는 거친 흑빵을 나누어주었다>

    지역에 따라 빵의 재료로 밀과 보리, 메밀 등이 사용되었으며, 귀족의 일상식인 하얀 밀가루 빵은 오직 축제시에만 먹을 수 있었다. <농업 기술이 발달된 14세기가 지난 다음에야 농민들이 예의 빵을 먹기 시작했는데, 이는 밀이 지대나 조세로 징수되어 영주나 영주의 가족, 군대에게 지급되는 고급 작물이었기 때문> 19세기 중반까지 흰 밀가루 빵은 노동자들에게 사치로 취급되었으며, 이들은 물 탄 가짜 포도주에 대해 과민한 반응을 보였다. 왜냐하면 손님에게 물을 대접하는 영주를 상상하기가 힘들 듯, 포도주를 마신다는 것은 꽤 오랫동안 특권계급에게 해당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17세기부터 조짐을 보였던 포도주의 이원화 현상-포도주의 질 하락-에 대한 일반 여론의 개탄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은 포도주의 대중소비에 많은 애착과 긍지를 지녔고, 포도주의 질에 대해 항상 남다른 주의를 기울였다.

    수프는 매우 평범한 식사였던 동시에, 구걸 일보 직전의 자들을 구제하기 위한 허울좋은 자선의 상징이기도 했다. 일종의 생활 무능력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빈자들의 수프는 16세기경 프랑스의 기근이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되었을 때, 최초로 만들어졌다. 이 수프를 만드는 비법은 18세기 영국에서 럼포트 경에 의해 새로 개발되어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고, 나폴레옹 시대에 다시 프랑스에 전해졌다. 이 스튜는 더러운 오물과 뼈의 수프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도 더불어 가지고 있었는데, 왜냐하면 8갈론(1갈론은 4,546리터)의 물에 5리브르(1리브르는 500그램)의 보릿가루, 향료와 풀, 그리고 마치 모르타르 반죽같이 찧은 청어 4마리와 뼈 등을 넣고 오랫동안 푹 익혀 만들었기 때문이다. 1차 세계대전 때의 독일과 오스트리아 군대의 보통식사이기도 한 이 음식은 곡사포의 맛없는 스튜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
    • CommentAuthororches
    • CommentTimeOct 21st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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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세기까지 귀족의 식습관은 마치 종교처럼 어느 나라이든 거의 비슷했다. 요리 자체보다는 식탁예절에 대한 변화의 움직임이 일고 있었으며, 이 당시 활발하게 보급된 요리책으로는 플라틴느 드 크레몬느(이탈리아에서 출생했으며, 요리사가 아니라, 여러모로 프랑스에 영향력을 끼치던 메디치가와 절친한 사이인 바티칸 도서관의 사서였다)가 1474년에 발표한 정중한 쾌락의 서적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일종의 요리와 건강의 공생관계를 강조한 이 책은 곧 불어와 독어로 신속하게 번역되었다.

    카드리느 드 메디치가 정략적인 이유로 시집을 올 때, 이 때 엉겅퀴의 심, 파르마산 치즈, 송아지요리, 멜론, 그리고 (프랑스 사람들이 처음보는) 샤베트 등도 함께 들어왔다. 식탁에는 베니스의 유리잔, 우르비노의 도기, 자수를 놓은 식탁보, 은제식기, 세련된 포크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카드리느 자신은 포크를 사용하지 않았고, 뜨거운 요리를 먹을 경우 골무를 사용했다. 또한 그녀는 예법을 완전히 뜯어 고쳤는데, 15세기 말경의 귀부인들은 음식을 씹는 모양을 남에게 보이는 것을 흉하게 생각해 독방에서 홀로 식사를 했다. 카드리느는 연회석상으로 나올 것을 명했으며, 귀부인들이 연회에 모이는 이러한 습관은 영국에 들어갔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시대에 전승되어 베르사유 궁정 연회의 원형이 된다.

    근대적인 형태의 포크는 베니스의 도메니코 실비오 총독 부인이 최초로 발명했다고 전해진다. <최초의 포크는 이집트에서 발명되었는데, 식탁용이라기보다는 솥 안의 고깃덩어리를 집어내는 갈고기로 많이 사용되었다>1606년 베니스를 여행한 영국 상인 토머스 콜리어트는 본국으로 이 포크를 가져갔으나 하느님이 주신 손을 모독하는 것이라는 비난을 받을 정도로 당시 엄청난 스캔들로 치부되었다. 러프 혹은 프레즈가 유행하던 시대에 이르러서야 사람들은 서서히 사용했다. (간혹 이쑤시개처럼 사용하는 사람도 있었다) 프랑스가 이탈리아의 문화를 모방하는 것이 절정에 달했던 것은 앙리 3세가 다스릴 시기였는데, 본격적으로 포크가 사용되기 시작했고, 등 달린 편안한 의자가 도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