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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RPG 이야기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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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우리의 RPG 캐릭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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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14 Nov 2007 12:06:36 +0900</pubDate>
		<author>로키</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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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확실히 그런 걸 보면 '나의' RPG 캐릭터란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캐릭터에 대한 개인적인 로망이나 생각이 어떻든 간에 그걸 받쳐줄 플레이와 의사소통 구조 없이는 머릿속의 공상으로 그치니까요. 그런 면에서도 RPG는 사회적인 놀이라는 생각이 새삼 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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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우리의 RPG 캐릭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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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13 Nov 2007 17:03:40 +0900</pubDate>
		<author>orches</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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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로키님.. 함께 뛴 <del>여러 이유로 안습캐릭 2위를 달리는 리아가 있는</del> 글루미 선데이 캠페인의 경우를 생각해보아요' 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 기억으로는<del> 아마 모 분이 들어오시는</del>  스피레네 중반부부터 <del>막장으로 가는 직행열차</del>  이미 아실법 한 상황들이 진행되었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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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우리의 RPG 캐릭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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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06 Nov 2007 23:22:40 +0900</pubDate>
		<author>로키</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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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저런..(..) 고생하셨군요. 그런 기대의 불일치가 생겼을 때 GM한테 이런 부분이 좀 불만이라는 얘기는 하셨나요? 아니면 그 전에 기대치 조율 과정이 있었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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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우리의 RPG 캐릭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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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04 Nov 2007 23:09:33 +0900</pubDate>
		<author>orches</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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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저 역시 인상적인 캐릭터는 많지만.. <s >다 고생고생해서 만든 내 새끼들이어서 고르기가 어려워요</s> 그 중 제일 인상적인 캐릭이라면 <s >리아와 키셀이 아슬아슬하게 추격했습니다만..</s> 스피레네 캠페인에서 뛰던 루리케. 자신을 길러준 파파를 만나기 전의 기억이 없는, 북쪽나라 음유시인 아가씨. 그녀가 모종의 이유로 고향에서 내려온 순간부터.. 그녀의 인생은 크게 바뀌었습니다. 스피레네는.. 지금까지도 플레이어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마의 캠페인이랄까요. 언제부터 균형이 깨졌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평범한 대륙여행기라고 생각했었고, 원하던 축제라든지 플레이어들끼리의 오붓한 쇼핑 등은 잘 나오지 않았고, 마지막엔 뒤통수를 거하게 맞았습니다. 플레이 중간중간.. 죽을 뻔한 위기도 꽤 찾아왔더랬지요. 평상시에는 주사위 운이 없더니.. 그럴 때만 주사위 운이 좋아서, 좀비처럼 살아나고는 했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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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우리의 RPG 캐릭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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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30 Oct 2007 00:13:57 +0900</pubDate>
		<author>로키</author>
		<description>
			<![CDATA[ RPG의 즐거움 중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RP 부분, 즉 특정 인물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캐릭터는 RPG라는 경험에서 중요한 일부가 되지요. 이것은 참가자에게는 더 그렇지만 진행자에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인상깊었던 인물들 얘기를 해보면 어떨까요. <br /><br />이런저런 인상적인 캐릭터는 많지만 개인적으로 RP하기 제일 재미있었던 건 겁스로 한 현대 초자연 수사물 언더월드 3기에 나온 '리이'입니다. 본명 이안나, 돈 좀 있는 집 장녀이지만 조기유학 가서 구제불능의 날라리가 되고, 한국에 나왔다가 덜컥 신병에 걸려 지지고 볶다가 신내림을 받은 무당 아가씨였죠. 그러면서도 허영덩어리 어머니하고는 180도 다르게 순수하고 솔직한 성격이기도 했고요. 풍자성도 강한 설정이었고, 굉장히 엉뚱하고 시끌시끌한 성격이라 코믹한 캐릭터 플레이 재미도 있었습니다. <br /><br />능력치면에서는 비교적 고CP라서 이런저런 영적 능력을 많이 넣을 수 있었습니다. 관련 장점은 많지만 처음에는 기능은 비교적 낮아서 '재능은 있지만 경험은 없는 애기무당' 설정에도 맞았고요. 특히 치유 장점 때문에 거의 클레릭..(..) 전투 능력은 거의 없어서 전투 때는 사실상 구경만 했다는 점은 좀 아쉽지만, 설정에는 그게 어울리긴 했죠. <br /><br />어느 정도 하다 보니까 더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없을 것 같아서, 그리고 리이처럼 순수하고 정감있는 인물이 잘못되면 그만큼 감점적 타격도 클 것 같아서 악당 만들자거나 죽이자는 얘기도 했었죠. 대체 캐릭터도 서넛 정도 설정하거나 시트까지 짰었는데 어느 하나도 딱히 맞아떨어지진 않았고요. 결국 계획과 대화만 무성하다가 깔끔하게 끝맺기 전에 캠페인이 끝나버렸습니다. 죽이려는 음모가 실패했으니(?) 아마 리이는 지금도 신도시 어디엔가 어슬렁거리며 지내고 있을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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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자기소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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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29 Oct 2007 10:15:46 +0900</pubDate>
		<author>아카스트</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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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아카스트라는 닉네임을 사용하고 있는 10대의 끝자락에 선 유학생입니다. 이따금 아리스티데라는 이름도 쓰곤 하지만 생각보다 드문 이름이 아니라 어디서 같은 이름을 쓰고 있는 사람이 저라고는 장담 못합니다 (?). 처음 RPG를 접한 건 넓은 의미에서는 중학생 때 접한 플레인스케이프:토먼트가 되겠고, 좁은 의미에서는 그 게임을 접하고 일 년 즈음 지나 시작한 어설픈 AD&D 플레이가 되겠네요.<br /><br /> 아 그렇지. 인간이 아니므로 신고하겠습니다 (?!).<br /><br /> 한동안 아는 사람들끼리만 마스터링을 하다가 재작년 즈음에 그 작은 커뮤니티를 벗어났습니다. 주로 하는 룰은 겁스나 AD&D이고, 동적인 이야기를 짜 나아가는 형식의 RPG를 좋아합니다. 아무래도 글을 쓰는 데에 익숙하다 보니 룰 자체를 보기보다는 그 룰이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데에 있는 방향성애 대해 더 신경을 쓰게 되는 면이 있는 것 같네요.<br /><br /> 한동안 마스터링만 하다 그만두고, 요즈음은 로키님이 마스터링하시는 제다이의 꿈과 희망과 사랑을 담은 (?!) 스타워즈: 공화국의 그림자를 플레이중입니다. 사랑스러운 조연 코티에르를 만들어낸 장본인이기도 하지...요?<br /><br /> 글을 이것저것 써 오다 보니 다양한 배경지식에도 꽤나 관심이 있습니다. 주로 관심있어 했던 것은 르네상스 이후부터 산업 혁명 즈음까지의, 약간 광범위한 시대이긴 합니다만, 유럽이지만, 요즈음은 켈트 신화를 공부하고 있기도 해요. 경험해본 룰은 D&D classic, 3.0, AD&D, GURPS 4.0th, M&M, True 20, 그리고 룰 공부는 했으나 플레이 경험은 없는 3.5나 언젠가 플레이하고야 말겠다며 읽었던 WoD: Wraith The Oblivion, 그리고 현재 플레이중인 포도원의 룰 등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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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간략하게 적어보는 18세기의 복식 (2)</title>
		<link>http://lokasenna.pe.kr/forum/comments.php?DiscussionID=16&amp;Focus=53#Comment_53</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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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26 Oct 2007 08:14:31 +0900</pubDate>
		<author>orches</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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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부끄러운 자료를 읽어주시고 댓글도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보기 좋게 정리도 들어가야 할 것 같고.. 추가할 것 있으면 해야할 것 같은 자료입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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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간략하게 적어보는 18세기의 복식 (2)</title>
		<link>http://lokasenna.pe.kr/forum/comments.php?DiscussionID=16&amp;Focus=52#Comment_52</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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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24 Oct 2007 10:13:58 +0900</pubDate>
		<author>로키</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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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이거 다 조사하느라 정말 힘드셨겠어요..;; 별 활용이 없었다는 점이 안타까울 따름이네요. 앞으로 이 유용한 자료가 더 빛을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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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간략하게 적어보는 18세기의 복식 (2)</title>
		<link>http://lokasenna.pe.kr/forum/comments.php?DiscussionID=16&amp;Focus=51#Comment_51</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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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21 Oct 2007 23:27:17 +0900</pubDate>
		<author>orches</author>
		<description>
			<![CDATA[ 의식주만큼 그 당시 사회의 위계 질서를 나타낸 것도 없을 것이다. 귀족의 천국, 농민의 지옥이라고 불리는 이 시기에는 각 계급이 자기의 사회적 신분에 알맞은 의복을 착용했다. 당시의 민중의 옷은 천의 질이나 약간의 장식을 제외하면 도시민과 시골민의 차이가 명확하지 않았다. 루소의 에밀같은 책 등을 통해 주장된 교육론에 의해 조금씩 달라지기는 했으나, 아이들 역시 성인들의 축소판과도 같은 옷을 걸치고 있었다. 또한 중세에는 여성복의 재단과 봉제를 남성재단사가 맡아서 했지만,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여성 재봉사에게 의상 제작권이 넘어왔다. 그리하여 최고의 건축가, 뛰어난 장식가라는 별명이 붙은 여성 모드 상인의 손에 의복의 최고 결정권이 집중되었고, 남성들은 (남성 디자이너의 지위가 확립될 때까지) 단지 이 상인들의 지시에 따라 소재를 제공하는 하급 도급업자로 전락했다. <br /><br />루이 14세 시대의 민중들은 주로 어두운 색의 질기고 단단한 모직물을 입었다. 모직물은 세탁하기도 힘들고, 가격도 비싼 편이라 대를 걸쳐서 물려입었다는데, 세탁을 자주 하지 않아 때가 묻고, 때로는 이상한 악취도 풍겼다. 그러나 18세기 말, 도시민 특히 파리 민중의 의복소비는 놀라운 발전을 하게 된다. 목면 공업의 발전으로 염색이 잘 되는 나염 직물(목면)이 대량 보급되었으며, 그로 인해 서민 복장은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그리하여 의복에 대한 선택이나 기호에 상당한 변화가 생겼고, 국가의 필요에 의해서 자꾸만 새로운 옷을 소비하도록 강요를 당했다.<br /><br />귀족들의 사치스러운 생활에 대한 사회적 모방은 주로 경제계급인 중산층을 통해 이루어졌다. 중산층 특히 부르주아 부인의 복장은 루이 14세 시대나, 루이 16세 시대나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다만 품위있는 귀부인의 표시로 보닛(머리 치장을 위한 헝겊모자)과 에어프론을 걸쳤다. (세바스티앙 메르시에는 파리의 정경이라는 책을 통해 이 문제의 보닛을 구입하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고 찬거리를 절약하는 소시민의 아내를 약간 풍자적으로 비판했다) 그러나 검소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무엇을 입고, 먹는 것이 신분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사회에서 상류층을 따라할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신분적 상승을 의미했다. 상류층의 하향식 문화 전달은 주로 하인층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자기들이 섬기고 있던 주인들의 문화를 가장 열심히 모방했던 것도 바로 이 하인층 출신의 사람들로, 어떤 면에서는 서민과 귀족 문화의 매개체 역할을 담당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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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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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간략하게 적어보는 18세기의 복식 (1)</title>
		<link>http://lokasenna.pe.kr/forum/comments.php?DiscussionID=15&amp;Focus=50#Comment_50</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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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21 Oct 2007 23:25:47 +0900</pubDate>
		<author>orches</author>
		<description>
			<![CDATA[ 화려함에서 단순함으로 돌아선 의상에 대해 사가들은 그 주요원인으로, 마리 앙투아네트가 즐겨 입은 농부 스타일의 의상과, 인간 행동의 간소화를 외친 장 루소의 자연주의, 영국에 대한 강력한 심취,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당시 귀족들의 파산을 꼽고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화려한 의상에 대한 반발모드로 나타난 왕실모드의 급격한 변화는 유명한 리옹 견직업의 불경기를 초대함으로써 경제의 위기를 심화시켰다. 인플레 현상은 점점 극심해지고, 엄청난 빵 값의 인상으로 민중들의 폭동 현상이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일어났다. <br /><br />또한 18세기 후반부에는 여성들의 과도한 머리장식이 대대적으로 유행했다. 이것은 컬이나 웨이브로 크게 부풀린 헤어스타일 위에 대형모자를 올려놓은 것이다. 그 당시의 건축가는 부인의 헤어스타일에 맞추어 상인방(기둥과 기둥 사이의 벽 윗부분에 가로지른 나무)의 높이를 조절해야만 했다. 1770년의 머리장식은 약 3800종류였으며, 이 열광적이라고 불릴 유행병은 미용사에게도 중요한 역을 부여했다. 또한 이 유행병은 점점 기발한(..) 머리들을 탄생시켰는데, 급기야 얼굴이 전신의 한 가운데 보이는 울트라 하이의 머리형이 등장하게 되었고, 부인들은 무릎을 꿇어야 겨우 마차에 탈 수 있었다. 보라르가 이런 궁지에 몰린 귀부인들을 위해 온화한 어머니의 보닛이라는 것을 발명하게 되는데, 이 보닛은 속에 용수철을 장치한 것으로 거리를 다닐 때는 헝겊 모자의 일종인 단아한 보닛으로 보이지만, 사교장의 문으로 들어서는 찰나에 스프링의 작용으로 머리형이 약 1미터 이상 튀어올랐다. 이 보닛은 특히 중산층 부인들이 많이 모방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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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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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간략하게 적어보는 18세기의 복식 (1)</title>
		<link>http://lokasenna.pe.kr/forum/comments.php?DiscussionID=15&amp;Focus=49#Comment_49</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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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21 Oct 2007 23:25:22 +0900</pubDate>
		<author>orches</author>
		<description>
			<![CDATA[ 태양왕 사후에 볼 수 있는 18세기 복식의 전반적인 특징은 여성적인 요소와 더불어서 쾌락추구라든지 기존 질서에 대한 파괴 성향이 강하게 작용했다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귀족들의) 생활이 방종해지고, 퇴폐적인 분위기가 생겨났으며, 문화의 중심이 궁중에서 살롱 쪽으로 옮겨갔다. 상류층의 사교장인 살롱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여성이었으며, 화려한 부인복은 사교 장소에서 중요한 장식 역을 수행했다. 이런 생활관을 바탕으로 로코코 스타일이 확립되게 된다. 자극적인 향수를 뿌리고, 환상적으로 과정된 머리와, 가는 몸통, 마음껏 부풀린 스커트, 넘칠 것 같은 장식 등을 통해, 엉덩이와 허리, 가슴의 에로티시즘을 추구했다. 루이 15세가 다스린 시기에 가장 융성했던 이 양식은 파리의 살롱을 중심으로 발전하여, 각지에서 독특한 양식을 창조했다. 유럽의 다른 나라들은 프랑스의 모드를 모방하기 시작했으며, 파리에서는 주기적으로 최신 유행의 옷을 입힌 실물 크기의 마네킹을 런던으로 보냈다. 이 마네킹은 런던을 경유, 유럽 각국을 순회했다.<br /><br />루이 16세 시대에는 여성복 분야에 전례없는 사회적 붐 같은 것이 조성되었다. 이 여파로 1770~ 1790년 사이에 무려 15종류의 정기 간행 모드 잡지가 발행되었다. 이 시대는 아직도 다양한 소매의 주름 장식과 진주, 보석 등으로 장식된 파니에(치마를 둥그렇게 퍼지게 하는 살대를 넣은 페티코트의 일종)가 붙은 드레스의 시대였다. 그러나 평상시의 귀족들은 폴로네즈라는 폴란드 식의 비교적 간편한 의상이나, 이를 변형한 실용적인 옷을 걸쳤으며, 파니에가 붙은 드레스는 궁정이나 무도회, 극장 등에서 볼 수 있었다. 귀족이나 부르주아 남자들의 경우는 퀼로트라는 이름의 신축성이 있는 짧은 바지를 입었다. <br /><br />1780년에 프랑스 의상에는 두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첫 번째는 영국에 대한 열광과 영국 모드의 채택이었다. (루이 16세 초기 시대에는 영국식 드레스인 로브 아 랑글레즈가 유행했다) 여전히 꽃, 리본매기, 레이스, 부풀린 스커트 등의 로코코 스타일이 유행했으나, 이와 더불어서 삼층의 칼라가 달린 프록코트의 일종인 르당고트와 재킷 등 남성적인 분위기의 모드도 유행했다. 둘째로는, 종전에 사용하던 살대 파니에 대신 간편하게 허리에 대는 허리받침의 일종인 투르뉘르가 유행되었다. 투르뉘르의 유행으로 모드 아 라 프랑세즈 대신 당시 트리아농 궁전에 은둔하고 있던 마리 앙투아네트의 양치는 처녀 스타일의 드레스에서 영향을 받았을, 그리스 식의 단순한 드레스가 등장함으로써 왕실 모드에 급격한 변화를 초래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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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간략하게 적어보는 17세기의 복식</title>
		<link>http://lokasenna.pe.kr/forum/comments.php?DiscussionID=14&amp;Focus=48#Comment_48</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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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21 Oct 2007 23:23:52 +0900</pubDate>
		<author>orches</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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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이러한 혹독한 노동조건 아래에서 예술적인 모드는 생겨나기 시작했다. 콜베르는 프랑스의 모드를 스페인의 금광에 비교한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아마도 모드가 당시 수출산업에 있어서 최고 인기 품목 중의 하나였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18세기 초까지는 자신의 의복을 스스로 선택한다는 모드의 개념이 특권계층의 여성들 사이에서만 정착된 것이었고, 점차 고급 맞춤복을 의미하는 오트투뤼르라는 복식사업으로 의미가 바뀌었다) <br /><br />그러나 과도한 중상주의와 무거운 세금 및 수차례에 걸친 대외전쟁 등은 농촌을 피폐하게 했다. 전국적인 대기근 소동이 두 번이나 있었다. 노동자들은 하루에 번 돈으로도 그 날 먹을 빵을 살 수 없었다. 농민들 역시 좀처럼 빵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어쩌다 아이가 빵을 들고 길을 나서면 그 빵 때문에 목숨을 잃기도 했다. 곡식은 으레 익기도 전에 다 베다 먹어치우게 되었으며, 겨울에는 땔감이 없어서 가축과 붙어 자고, 먹은 음식이 소화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가능한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br /><br />루이 14세 시대의 최고 군사전문가인 보방은 프랑스 전체 인구의 10분의 6이 구걸 일보 직전이라고 약간 과장되게 기술했다. 그러나 그가 왕국의 십일조세를 저술했던 주요 목적은 무거운 세금에 시달리는 이들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었음으로, 사태를 실제보다 약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휼륭한 통계학자이기도 했던 보방은 민중의 생활 수준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도시의 직조공과 농촌의 일일 노동자를 그의 표본으로 선정했다. 1년에 180일 정도의 노동일수에다가, 직조공은 연간소득이 108리브르이고, 일일 노동자는 90리브르를 벌 수 있다고 가정했다. <br /><br />그 당시 평균 가족의 수는 4명으로, 이 두 가정의 연간 음식물 소비는 60리브르. 전체 가계의 절반을 훌쩍 넘어 있었다. 이 중 곡물 소비는 55~66%를 차지하고 있었고, 사치 중의 사치에 속했던 육류소비는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래서인지 어느 이탈리아 사람은 프랑스에서 인구의 10분의 9는 굶어죽고, 그 나머지 10분의 1은 너무 많이 먹고 죽는다고 비꼬았다. 이런 상황에서 상류층의 우아한 모드나 자극적인 향수, 화려한 춤의 파노라마 등은 거의 입에 풀칠도 하기 어려운 서민들에게 꿈나라 같은 일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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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간략하게 적어보는 17세기의 복식</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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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21 Oct 2007 23:23:30 +0900</pubDate>
		<author>orches</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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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15세기에서 17세기 경에 해상무역을 독점한 탓일까? 17세기에는 간소한 네덜란드 식 의상이 유행했다. 편리하고 실용적이라는 점에서 남성, 특히 군인복에 채용되었고, 다시 남성 시민복의 실용화가 가미되었으며, 서서히 남성미에 대한 이미지가 싹트기 시작했다. 그러나 스페인 복장이 완전하게 밀려난게 아니어서, 17세기 중엽까지 예복 등의 옷에서 그 흔적을 보이고 있다. 또한 이 시기에 잠옷을 입고 자는 풍습이 형성되었다. 17세기 중엽이 지나자, 프랑스는 상업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놀랍게 발전하게 된다. 영국에서도 직물공업이 발전하면서 급기야 네덜란드를 제치게 된다. 그리하여, 네덜란드 복식의 국제성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영국와 프랑스, 이 두 양국이 유럽 복장 문화의 결정적인 역을 수행하게 되었다. <br /><br />루이 14세 시대에 절대주의는 최고 절정을 이루었다. 사회를 이루는 모든 것이 왕을 중심으로 일종의 방사선을 그리며 전개되었으며, 남성적인 분위기의, 장식이 조금 과장된 바로크 스타일이 도입되었다. 파리가 모드의 중심이 된 것은 16세기 말이었으나, 복식 전문가를 궁정에 끌여들여 본격적으로 이런 역을 수행하게 된 것은 궁중문화가 가장 빛났던 루이 14세 시대인 17세기 말부터이다. 특이한 공개 취향을 가졌던 태양왕은 쇼맨쉽에 있어서도 일인자였다. 새벽에 일어났을 때, 옷을 갈아입을 때, 식사할 때, 그리고 저녁에 잠들 때 으레 시종관, 의상계, 주방장, 시의, 성직자, 귀족 등을 모아놓고 거추장스러운 의식을 가졌다. (왕의 일을 돕는 것을 일생 일대의 영광으로 알았다지만..) <br /><br />이 시대는 상류사회와 하류사회의 상황이 극적인 대조를 이루며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사치품 공업이 중상주의 정책의 비호 아래 급속하게 발전했다. 당시 재무장관이던 콜베르는 그때까지 이탈리아,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등에서 구입하고 있던 사치품을 프랑스 내에서 직접 만드는 정책을 추진했다. 하지만 제품이 최고였던 것과는 판이하게 노동조건은 최악이었다. 노동자의 대부분은 강제노동에 동원된 고아나 부랑자, 정치범이었는데, 이들은 병영식 같은 구조 안에서 엄격한 감독을 받으며 14시간 이상의 중노동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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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간략하게 적어보는 16세기의 복식</title>
		<link>http://lokasenna.pe.kr/forum/comments.php?DiscussionID=13&amp;Focus=46#Comment_46</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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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21 Oct 2007 23:22:37 +0900</pubDate>
		<author>orches</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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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이 시대의 손수건은 사치품이었다. 특히 비단 천이거나 금,은 세공이 박혀있는 손수건은 너무도 비싸서 귀족들의 유언장에 귀중품의 하나로 명시되었다. 16세기 말쯤에 옷소매로 코를 닦는 행동을 금지하는 예의범절 책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손수건은 땀을 닦는 한편, 코를 푸는 용도, 손에 들고 다니다 햇볕이 나면 머리를 가리거나 구애의 도구 등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영국에서 손수건은 진실한 사랑의 매듭이라고 불렸다. 사랑하는 이의 머릿글자를 넣고 한 쪽에 술을 단 한면이 4인치인 사각형 천을 남자들은 모자의 머리에 꼽고 다녔으며, 여성들은 가슴 사이에 넣고 다녔기 때문이다. <br /><br />또한 중세에는 헝겊으로 만든 작은 가방에 돈이나 열쇠를 보관했었으나, 암살자들이 단도를 숨겨다닐 수 있다고 두려워한 샤를 9세가 재봉사들에게 돈주머니를 만들게 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바지에 호주머니를 달게 되었다.<br /><br />16세기 후반에는 그 당시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던 스페인의 복장이 유행했다. 중세에는 땅에 질질 끌리는 고딕풍의 옷자락이 주를 이루다가, 르네상스 기에는 이탈리아 식의 자유롭고 우아한 의상이 유행했으며, 스페인의 국력이 강해지면서 카톨릭의 근엄성이 강조되었다. 이 당시 스페인 귀족 부인의 초상에 그려진 의복을 자세히 살펴보면, 지나칠 정도의 표면 장식과 액세서리, 얼굴이 거의 파묻힐 정도로 화려한 프레즈가 온통 목을 감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여성의 가는 몸매를 강조하여 허리를 꽉 조이고, 상대적으로 스커트의 폭을 넓히고 있다는 사실도 말이다. 상대적으로 몸통을 가늘게 보이고 상체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간혹 철제를 재료로 한) 코르셋을 사용했는데.. 앙리 2세의 왕비가 입은 코르셋의 허리 둘레가 40센티미터였다고 전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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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간략하게 적어보는 16세기의 복식</title>
		<link>http://lokasenna.pe.kr/forum/comments.php?DiscussionID=13&amp;Focus=45#Comment_45</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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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21 Oct 2007 23:22:05 +0900</pubDate>
		<author>orches</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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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유행을 이끌었던 국가는 이탈리아였다. 특히 16세기 프랑스 의상은 15세기 말의 베니스 유행에 상당한 영향력과 지배를 받았다. 사람들이 선호했던 여성의 머리색은 금발이었는데, 여성들은 이탈리아에서 만든 샤프란과 양파껍질을 섞어 만든 물감을 이용해서 머리를 금색으로 물들였다. (상당한 영향이라고 언급했지만, 유럽 북쪽의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에 비해 1세기 가량 늦게 일어났다) <br /><br />이탈리아 식의 화려한 장식 등은 초기엔 도입되지 않다가, 루이 12세의 등극과 더불어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남성들은 몸에 꽉 끼는 상의인 푸르프웽이나 코타르디 등을 걸쳤는데, 시간이 갈수록 점점 짧아짐에 따라 쇼스라고 불리는 허리 바로 아래까지 오는 긴 양말을 신게 되었다. (14세기에 들어와 갑옷이 쇠사슬 연결형이나 비늘 모양의 신축성이 있는 형태에서 금속판의 형태로 변했다. 이에 적응하기 위해 갑옷 안에 입기 시작한 옷이 푸르프웽으로 발전했으며, 이 옷은 프랑스에서 18세기까지 지속되었다)<br /><br />16세기 남녀 복장의 공통적인 특징은 우선 안감이나 내의를 겉으로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 옷감에 벤 자국을 넣어 장식으로 삼은 타이아드 형을 들 수 있다. (이 타이아드 형태는 몸에 꽉 붙는 소매나 몸통, 바지 가랑이에 주로 사용해서 그 갈라진 틈으로 장식처럼 속옷이 살짝 드러나 보이게 했다)<br /><br />두 번째 특징으로 주름잡은 동정을 사용한 칼라 프레즈(=러프)와 별도로 크게 붙인 소매를 사용했던 점으로 들 수 있다. 이 둥근 주름 칼라는 처음에는 작게 만들어져 턱부터 후두부를 장식했으나 칼라의 사이즈가 유행을 쫓아 점점 커지면서 어깨 넓이까지 그 직경이 넓어졌다. 이 거창한 칼라 양식은 포크의 전파에도 한 몫 거들었을 뿐만 아니라, 스푼이 도저히 입에까지 닿지 않자 스푼의 자루까지 길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또한 이 당시에 남자다움을 강조하기 위해 어깨나 가슴, 소매 윗부분에 심을 넣어 부풀게 하는 풍습이 생겨났다. (러프는 다양한 색이 있었는데, 흰색과 노란색이 특히 유행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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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근세의 요리 (4)</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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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21 Oct 2007 23:15:00 +0900</pubDate>
		<author>orches</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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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중세 이후부터 손님들이 정식용 식탁에서 일제히 식사할 수 있는 식당 겸 여인숙과 선술집이 길목이나 중개역 등에 많이 생겨났다. 이들은 대체로 사회의 하층민을 고객으로 받았다. 1765년 샹 다조라고 일컬어지던 블랑제라는 인물이 풀리 거리(현재의 루브르 거리)에 고기 수프를 파는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레스토랑을 최초로 열었다. (이 레스토랑이라는 용어는 원래 고기를 넣고 푹 끓인 수프를 의미했는데, 마시는 이의 정력을 회복시킨다는 의미에서 회복 수프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br /><br />이를 모방해서 적지 않은 레스토랑이 생겨났는데, 새로움과 양식, 고가가 그 당시 레스토랑의 3대 특징이었으므로 일반 서민은 화려한 정식용 식탁에 감히 앉아볼 꿈도 꿀 수 없었다고 한다. (미식 연감의 저자로 잘 알려진 그리모 드 라 레이니에르에 의하면 클럽에서 식사하기 좋아하는 영국인들에 대한 모방과 혁명 당시의 집 없는 입법가들의 파리 쇄도 현상도 이유의 한 가지로 들었다) 혁명이 일어난 후 레스토랑은 졸지에 실직하게 된 수석 요리사들이 거리에 뛰쳐나와 우후죽순처럼 세움으로써 프랑스 요리의 중심이 되기 시작했다. 개구리 요리도 18세기 말 리옴 지방의 시몽이라는 음식점 주인이 시몽식 개구리 요리를 발명함으로써 더욱 유명해지기 시작했고, 1775년 알자스 지방의 군사령관 콩타드의 젊은 요리사에 의해 거위나 오리 간의 파테인 푸아그라(당시까지만 해도 가금류, 닭, 거위, 수탉의 간을 의미했다)가 재발명되었다.<br /><br />이 시기의 정육점은 동업조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고기장수는 소와 송아지, 그리고 양을 살육하고 이를 판매할 권리가 있었고, 내장장수는 내장 따위의 허드렛고기를 판매할 수 있었다. 돼지고기장수는 파테나 햄, 소시지와 같은 제품의 형태로 익힌 다른 고기와 돼지고기 등를 판매했으나, 산돼지를 직접 도살하는 일은 금지되었다. 또 음식장수는 소스를 동반한 스튜 형태로 요리된 모든 고기를 취급했고, 불고기장수는 원칙상 불에 군 고깃덩어리는 모두 판매할 수 있었으나, 국물이 있는 스튜 판매는 금지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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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근세의 요리 (4)</title>
		<link>http://lokasenna.pe.kr/forum/comments.php?DiscussionID=12&amp;Focus=43#Comment_43</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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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21 Oct 2007 23:14:12 +0900</pubDate>
		<author>orches</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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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오늘날과 같은 샴페인이 등장한 것은 17세기였고, 그 전까지는 거품이 일지 않는 적포도주를 의미했다. 루이 14세의 주치의인 파공은 샴페인을 멀리하고 부르고뉴 포도주를 가까이하라고 충고하기도 했고, 1704년 본 지방의 수석의사는 상파뉴산 포도주에 대항한 본산 포도주에 대한 옹호론이라는 논문을 출판하기도 했다. 17세기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샴페인을 모두 통에 담아 날랐기 때문에 운반 도중 거품이 심하게 일거나 넘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후에 영국인들이 발명한 것으로 알려진 병 덕분에 운반은 좀 더 용이해졌으나, 불완전한 병마개와 발효의 불규칙성 때문에 병이 터지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베네딕트 파의 수도사인 돔 페리뇽은 포도의 적합한 배합과 설탕의 가미로 술의 발효를 잘 억제시키는 한편, 완벽한 병마개를 개발해 탄산가스의 거품이 끓어 넘치는 대신 포도주 속에 잘 용해되도록 조절함으로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했다. <br /><br />보르도산 포도주는 리슐리외 재상의 작은 조카이자 자유사상가인 리슐리외 원수 덕분에 18세기부터 영광스러운 위치를 차지했고, 포도주를 증류해서 만든 코냑은 라크로와 마롱이라는 기사에 의해 17세기경에 발명되었다. 18세기 말부터 이 술은 유명해지기 시작했는데, 1751년 백과사전에서는 화주 가운데 유명한 술이라고 소개되어있다. 18세기 후반에는 계절에 상관없이 아이스크림을 먹는 습관이 정착되었다. 17세기가 되면서 점점 유행하기 시작한 이 포도주는 (초기의 아이스크림은 흰 눈을 섞은 찬 포도주를 의미했다) 처음에는 여름철에만 먹었다. 1750년 이후에 계절에 상관없이 먹게 되었고, 1766년애 비로소 오늘날과 같은 형태가 되었다. <br /><br />럼주는 16세기에 발명되었다. 설탕을 만들고 난 찌거기, 즉 당밀을 발효, 증류, 숙성시켜 만들었기에 전형적인 값싼 술에 들어갔다. 진의 경우 1660년, 네덜란드의 제이덴 대학 의학부 교수 프란시스 실바우스가 주피퍼베리(노간주나무의 열매)를 원료로 해서 발명했다. 본래 해열을 위한 약용주로 개발했으나, 선원들이 럼주와 더불어서 즐겨마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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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근세의 요리 (3)</title>
		<link>http://lokasenna.pe.kr/forum/comments.php?DiscussionID=11&amp;Focus=42#Comment_42</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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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21 Oct 2007 23:12:11 +0900</pubDate>
		<author>orches</author>
		<description>
			<![CDATA[ 1600년 경에 커피가 유럽에 소개되었으며, 이 때부터 하나 둘 카페가 문을 열기 시작했다. 카페에서는 처음에는 커피만 팔았으나, 차, 코코아, 찬 음료, 샤베트, 아이스크림, 과자류 등의 차차 가벼운 식사도 팔기 시작했다. 이 중 코코아는 스페인의 왕녀 마리 테레즈에 의해 프랑스에 최초로 전해졌다. 이 음료는 주로 상류사회 귀부인이 즐기고 있었는데, 커피의 등장으로 점점 밀려났다. 카페오레, 즉 밀크커피는 1690년에 퍼지기 시작해서, 18세기에 서민층 사이에도 광범위하게 정착되었다. 이 음료는 작업장에서 일하는 파리 육체 노동자들의 아침 식사 또는 점심 식사가 되었는데, 이들은 카페오레가 저녁까지 능히 버틸 수 있는 힘의 원천을 제공한다고 말하면서 상당량을 마셨다. 이렇게 커피의 수요가 늘면서 수프 소비도 감소되었다. <br /><br />17세기 말 경의 파리에는 프 프로코프라는 이름의 카페가 단 하나 있었지만, 1721년에는 300여개 이상, 18세기 말기에는 2000개가 넘는 카페가 문을 열었다. 카페는 신분적 차별이 거의 없었다. 귀족, 문인, 예술가, 극단배우, 상인, 부르주아 뿐만 아니라 잘 차려입고 돈을 지불할 능력과 시대적인 예의를 지킨다면 누구나 출입을 할 수 있었다. &lt;여성들에게도 카페 출입이 허용되었다&gt;<br /><br />18세기에 이르게 되면 여성은 식탁에서 거의 남성과 동등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성이 선 채로 음식 시중을 들어야하고, 식사가 끝난 뒤 따로 먹는 습관이 남아있던 시골은 예외로 쳐야할 것이다. 18세기의 상류사회의 귀부인들이 식당보다 살롱을 우아하게 지키고 있었다면, 19세기의 여성들은 안주인으로써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 전까지는 식사를 기념하고, 만찬 초대에 대해 사례방문을 하고, 또 아침에 요리사와 음식을 상의하는 것은 모두 남성의 권한에 속했다. 덧붙여서 요리용 곤로가 발명되기 전까지, 아궁이에 의한 치명적인 화상은 출산 다음으로 여성의 가장 높은 사망 원인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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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근세의 요리 (3)</title>
		<link>http://lokasenna.pe.kr/forum/comments.php?DiscussionID=11&amp;Focus=41#Comment_41</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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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21 Oct 2007 23:09:58 +0900</pubDate>
		<author>orches</author>
		<description>
			<![CDATA[ 17~18세기에 들어서면서 식탁 예절은 좀더 개인주의화되었다. 포크를 접시의 왼쪽에 놓고 포크의 날을 냅킨 쪽으로 눕히며, 칼을 접시의 오른쪽에 놓고 접시 안쪽 방향으로 칼날을 놓는 방식이 채택된 시기이기도 했다. &lt;영국의 경우는 날이 향하는 방향이 반대이다&gt;<br /><br />개인용 접시의 사용은 루이 14세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속이 우묵히 패힌 이 개인용 접시는 17세기에 발명되었으며, 식객이라는 말도 아울러 생겼다. 이탈리아 도기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귀족들이 사용하는 대부분의 식기는 금속으로 만들어졌다. &lt;루이 14세가 모자란 왕실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은식기를 조폐국에 보낸 다음부터 도기가 식기로 유행하기 시작했으나, 금속식기에 대한 선호도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gt; 과거에는 빵을 자르기 위해 칼을 사용했으나, 이 시기에는 손으로 조금씩 떼어먹었고, 사라다를 먹을 때에도 칼 대신 포크와 빵조각을 이용했다. 17세기 말부터 장거리 여행을 떠날 때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우려한 나머지, 점차 식기 한 벌(포크와 칼)을 챙기기 시작했다. 17세기까지는 일반 가정에 식당이 따로 없었으며,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식당의 개별적 사용이 확립되기 시작한다.<br /><br />루이 14세의 통치 이후 프랑스의 식사예절과 요리는 빠른 속도로 유럽에 전파되었다. 제네바가 프랑스 사상과의 요리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러시아에서는 표트르 대제가 유럽의 창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세웠다.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2세는 볼테르를 초빙하고, 프랑스의 요리를 궁정에서 만들게 했다. 이처럼 프랑스의 궁정 모델을 모방하는 국가가 있었으나, 상당한 비판도 같이 뒤따랐다. 예를 들어 동시대의 영국인들은 프랑스인들이 감자를 상당히 불신하고 있다고 비판했으며, 영국에 비교해서 버터를 요리에 별로 사용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lt;당시 영국의 버터가 가장 질이 좋았다. 18세기에 이르러서야 방브의 버터가 유명해졌다&gt;<br /><br />태양왕이 사망하고 난 뒤, 엄격한 에티켓을 지켜야하는 거대한 연회 대신에 살롱에서의 우아한 사교모임에 걸맞는 야찬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식사시간은 점점 뒤로 물러나는 경향을 보였다. &lt;그 당시의 풍조는 후에 혁명을 일으킨 요소 중 하나가 되지만, 귀족들에게는 그야말로 사는 즐거움이 충만한 시대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물론 충분한 수단과 여유가 있는 귀족들이...&g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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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근세의 요리 (2)</title>
		<link>http://lokasenna.pe.kr/forum/comments.php?DiscussionID=10&amp;Focus=40#Comment_40</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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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21 Oct 2007 23:06:34 +0900</pubDate>
		<author>orches</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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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17세기에 이르러서 식생활과 내용은 크게 달라지게 된다. 이 시대의 요리 골자는 음식의 자연스러운 맛을 최대로 살리자는 것이다. 중세의 가장 대표적인 향료로 정향, 육두구향, 갈색 후추, 계피를 꼽을 수 있으며, 후추의 사용량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17~18세기 요리책에서 후추가 차지하는 비중은 20% 정도로, 사프란 향처럼 아예 요리책에서 사라진 향료도 있었다. (18세기 백과사전에서는 스페인 사람들은 그냥 놀며 빈둥거리는 것만큼 바닐라 향을 좋아한다고 비꼬기도 했다) 여전히 남아있는 향료로는 과자나 럼에 설탕, 레몬, 뜨거운 물을 탄 그로그란 음료에 넣는 계피와 생강을 들 수 있다. 1688년에 간행된 한 이탈리아 요리책은 그 때까지 전통적으로 사용되던 향료의 대부분이 레몬즙으로 대체되었다고 기술했다. (대체된 원인은 항료에 대한 판로가 개척되어, 가격이 하락하기도 했을 뿐더러, 흔해진 향료를 대신할 커피나 차, 초콜릿, 담배와 술 등의 사치품목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br /><br />향료가 사라진 자리에 들어앉은 것은 다름아닌 그들의 선조가 빈자들의 향료라고 무시했던 요리용 풀들이나 국소적인 양념, 겨자였다. (중세 때, 풀이나 채소, 구근식품 등은 귀족의 식단이나 장부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다.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수프의 재료로 쓰이는 이 요리용 풀들은 가난한 이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중세의 의사들은 섬유질이 많아 소화하기 힘들기 때문에 거칠고 질긴 농민의 위장에나 어울리는 음식이라고 인식했다고 하며, 그 이유를 들며 귀족들에게 채소를 멀리하라고 권고했다) 과거에 비해 식초나 소금에 절여 보관하던 음식, 건조 훈제식품의 소비가 많이 줄게 되었고 (훈제된 생선, 특히 청어는 고기보다 훨씬 가격이 저렴할 뿐더러, 종교적으로 고기를 먹지 못하는 시기에 유일하게 허용되던 동물성 식품이었기에 대중의 애호를 받았다), 중세의 이중식 요리법(예를 들어 고기의 맛을 부드럽게 하면서, 동시에 국물도 얻기 위해, 고기를 굽기 전에 물에 넣고 오랫동안 푹 삶거나 끓인 것이라든지)도 서서히 자취를 감췄다.<br /><br />이 당시에는 교통 수단이 개량되었고, 마차나 우차가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도로가 많이 증가했다. 그것은 자기 집에서 멀리 딸어진 지역의 산물을 식탁에 금방 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리라.소금에 절인 생선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치부되었고, 산지에서 막 도착한 생선이 새로운 요리법에 부응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보르도, 부르고뉴, 상파뉴 지방의 최상급 포도주의 질과 소비가 동시에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송비는 비싼 편이어서 대도시로 운반된 식품의 운송비가 원가를 뛰어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결국 귀족들만이 즐길 수 있었다. 귀족 이외에도 경제적으로 유복한 일부 계층에서 혼합곡을 사용해 만든 갈색 빵이나 거친 흑빵 대신 밀가루로 만든 희고 부드러운 빵을 선호했다. 18세기에 이르러 프랑스의 요리는 중세, 이탈리아 르네상스 요리의 영향에서 벗어났다. 장 자크 루소와 같은 이들은 자연으로 돌아갈 것을 설파하는 동시에, 지나치게 서민적이라고 기피되던 채소를 찬양했다. 또한 그들은 야채수프, 사라다, 고기 파이에 채소를 넣는 것 등을 강조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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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근세의 요리 (2)</title>
		<link>http://lokasenna.pe.kr/forum/comments.php?DiscussionID=10&amp;Focus=39#Comment_39</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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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21 Oct 2007 23:05:11 +0900</pubDate>
		<author>orches</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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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16세기 중엽에 파리에서 정기적인 장이 서기 시작하면서, 이 무렵의 사람들은 신선한 버터나 유제크림, 굴과 연어, 산딸기 등을 즐겨먹었다. 이 때 카바레가 대도시에 생겨났고, 가정 이외의 장소에서 식사하는 풍습이 생겨났다. 16세기 말 부르봉 왕가의 앙리 4세가 즉위했을 무렵, 위그노 전쟁의 결과 때문인지.. 어느 지방의 문서에는 ‘여윌대로 여윈 마을 사람들은 셔츠도 신발도 없고, 살아있는 사람들보다 무덤에서 나온 송장들 같았다’ 라고 기록되었다. 그와 중농주의자로 알려진 쉴리 공 등은 전쟁으로 황폐해진 농촌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했다.<br /><br />이 당시 새로 정착된 식습관문화에 따라 사람들은 11시나 정오경에 아주 늦게 조반을 먹기 시작했다. 또한 식탁의 장식이 더욱 화려해지고 부르주아층에서 은제식기가 유행하기 시작하여, 빵도마가 점점 식탁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앙리 4세는 도기 공장을 짓고, 은제식기 대신 도기를 사용하라고 권고했다) 독극물 방지용으로 사용하던 접시 위에 덮던 뚜껑은 음식이 식는 것을 막기 위해 계속 사용되었고, 1인용 스푼과 함께 흑단이나 상아 손잡이가 달린 칼이 식탁 위에 가지런히 놓였다. 한 차례의 상차림이 끝날 때마다 식탁보와 냅킨을 새로 깔았는데, 주인의 부를 간접적으로 상징하는 것이었다. &lt;최초의 냅킨은 모직으로 만들어졌으며, 주로 입을 닦는데 사용되었다. 손이나 어깨 위에 올려놓고, 식사 전후에 한 차례씩 입을 닦았다. 이후 랭스지방의 아마포로 만든 천이 서서히 유행했고, 예의 러프가 유행하던 시기에 목에 거는 습관이 생겼다가, 17세기에 오늘날처럼 무릎에 올려놓게 되었다&gt;<br /><br />칠면조 요리가 새롭게 선을 보였고, 연어 같은 고급 생선요리라든지, 개구리나 달팽이 요리도 귀족들의 식탁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lt;참고로 영국사람들은 13세기부터 이런 개구리를 잡아먹는 것을 질색했고, 노골적으로 프랑스인들은 개구리를 잡아먹는 이들이라고 비꼬았다&gt; 파티스리는 단 과자이기보다는 고기와 야채를 넣은 파이를 의미했다. 디저트로는 치즈와 신선한 과일 또는 잼으로 조린 과일이나 익힌 과일이 나왔다. &lt;설탕을 잔뜩 넣은 달디 단 과자를 내놓기에는 너무도 귀하고 비쌌다. 루이 14세 치세까지만 해도, 오직 약제사들만이 공식적으로 설탕을 판매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 설탕은 의약품으로 취급되었고, 상자에 넣고 자물쇠로 잠궈서 보관할 만큼 가격이 엄청나게 비쌌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어로 설탕이 없는 약제사라는 말은 가장 중요한 것이 결핍된, 즉 살 만한 물건이 없는 상점이나 직업을 가르키는 의미로 오랫동안 통용되었다. 설탕이 오늘날과 비슷한 역을 시작한 것은 커피와 초콜릿이 등장하면서부터다. 덧붙여서 그 당시의 꿀은 설탕에 비교해 서민들도 쉽게 구할 수 있는 편이었고, 싸고 풍부해서, 오늘날 설탕과 비슷한 역을 했다&gt; 또한 앙리 4세의 의사 조제프 뒤셴느가 질색할 만큼 당시 사람들은 폭주를 즐겼다. 궁정에서는 거품이 일지 않는 상퍄뉴의 적포도주와 오를레앙산 포도주를 대량으로 즐겨 마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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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근세의 요리 (1)</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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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21 Oct 2007 23:03:26 +0900</pubDate>
		<author>orches</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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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17세기까지 귀족의 식습관은 마치 종교처럼 어느 나라이든 거의 비슷했다. 요리 자체보다는 식탁예절에 대한 변화의 움직임이 일고 있었으며, 이 당시 활발하게 보급된 요리책으로는 플라틴느 드 크레몬느(이탈리아에서 출생했으며, 요리사가 아니라, 여러모로 프랑스에 영향력을 끼치던 메디치가와 절친한 사이인 바티칸 도서관의 사서였다)가 1474년에 발표한 정중한 쾌락의 서적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일종의 요리와 건강의 공생관계를 강조한 이 책은 곧 불어와 독어로 신속하게 번역되었다.<br /><br />카드리느 드 메디치가 정략적인 이유로 시집을 올 때, 이 때 엉겅퀴의 심, 파르마산 치즈, 송아지요리, 멜론, 그리고 (프랑스 사람들이 처음보는) 샤베트 등도 함께 들어왔다. 식탁에는 베니스의 유리잔, 우르비노의 도기, 자수를 놓은 식탁보, 은제식기, 세련된 포크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카드리느 자신은 포크를 사용하지 않았고, 뜨거운 요리를 먹을 경우 골무를 사용했다. 또한 그녀는 예법을 완전히 뜯어 고쳤는데, 15세기 말경의 귀부인들은 음식을 씹는 모양을 남에게 보이는 것을 흉하게 생각해 독방에서 홀로 식사를 했다. 카드리느는 연회석상으로 나올 것을 명했으며, 귀부인들이 연회에 모이는 이러한 습관은 영국에 들어갔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시대에 전승되어 베르사유 궁정 연회의 원형이 된다.<br /><br />근대적인 형태의 포크는 베니스의 도메니코 실비오 총독 부인이 최초로 발명했다고 전해진다. &lt;최초의 포크는 이집트에서 발명되었는데, 식탁용이라기보다는 솥 안의 고깃덩어리를 집어내는 갈고기로 많이 사용되었다&gt;1606년 베니스를 여행한 영국 상인 토머스 콜리어트는 본국으로 이 포크를 가져갔으나 하느님이 주신 손을 모독하는 것이라는 비난을 받을 정도로 당시 엄청난 스캔들로 치부되었다. 러프 혹은 프레즈가 유행하던 시대에 이르러서야 사람들은 서서히 사용했다. (간혹 이쑤시개처럼 사용하는 사람도 있었다) 프랑스가 이탈리아의 문화를 모방하는 것이 절정에 달했던 것은 앙리 3세가 다스릴 시기였는데, 본격적으로 포크가 사용되기 시작했고, 등 달린 편안한 의자가 도입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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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근세의 요리 (1)</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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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21 Oct 2007 23:01:19 +0900</pubDate>
		<author>orches</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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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이탈리아 사가 몬타나리의 견해에 따르면.. 유럽 남부에서는 대체로 빵과 포도주, 기름(올리브 유), 북부에서는 고기와 맥주 등이 주음식으로 꼽히는데, 기독교와 원시 게르만 전통의 아래, 대략 서기 3세기 경에 풍요와 기근을 헤아릴 수 없이 반복하면서 오늘날과 같은 유럽인의 골격이 잡혔으며, 사치스런 고급요리가 사회적 위신이나 권위를 나타내는 것이 확립된 것은 중세시기였고, 17세기 초까지도 이런 중세적 취향이 요리에 반영되었다고 한다.<br /><br />상류사회와 무관한 18세기의 농민 식사를 살펴보자면, 중세 때와 별로 변하지 않았다.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중세의 기본적인 음식은 빵과 뜬 숯불에 오랫동안 뭉근히 데워진 수프, 발효주인 포도주와 대체로 집에서 빚은 시드르라 불러진 능금주였으며, 가끔 고기나 달걀이라든지, 유제품 중 치즈를 곁들어 먹기도 했다. 비교적 부유한 시골 농가에서만 고기와 야채를 넣고 푹 끊인 수프가 식탁에 자주 등장했다.이들에게 굶주림은 매우 친숙한 관행이었고, 대개 잠두나 도토리를 넣은 거친 흑빵과 조잡한 포도주가 주된 식사였다. &lt;왕의 생일에 빈민들에게 빵을 나누어주는 것은 오래된 관습으로, 대부분 누룩이 없는 거친 흑빵을 나누어주었다&gt;<br /><br />지역에 따라 빵의 재료로 밀과 보리, 메밀 등이 사용되었으며, 귀족의 일상식인 하얀 밀가루 빵은 오직 축제시에만 먹을 수 있었다. &lt;농업 기술이 발달된 14세기가 지난 다음에야 농민들이 예의 빵을 먹기 시작했는데, 이는 밀이 지대나 조세로 징수되어 영주나 영주의 가족, 군대에게 지급되는 고급 작물이었기 때문&gt; 19세기 중반까지 흰 밀가루 빵은 노동자들에게 사치로 취급되었으며, 이들은 물 탄 가짜 포도주에 대해 과민한 반응을 보였다. 왜냐하면 손님에게 물을 대접하는 영주를 상상하기가 힘들 듯, 포도주를 마신다는 것은 꽤 오랫동안 특권계급에게 해당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17세기부터 조짐을 보였던 포도주의 이원화 현상-포도주의 질 하락-에 대한 일반 여론의 개탄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은 포도주의 대중소비에 많은 애착과 긍지를 지녔고, 포도주의 질에 대해 항상 남다른 주의를 기울였다. <br /><br />수프는 매우 평범한 식사였던 동시에, 구걸 일보 직전의 자들을 구제하기 위한 허울좋은 자선의 상징이기도 했다. 일종의 생활 무능력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빈자들의 수프는 16세기경 프랑스의 기근이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되었을 때, 최초로 만들어졌다. 이 수프를 만드는 비법은 18세기 영국에서 럼포트 경에 의해 새로 개발되어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고, 나폴레옹 시대에 다시 프랑스에 전해졌다. 이 스튜는 더러운 오물과 뼈의 수프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도 더불어 가지고 있었는데, 왜냐하면 8갈론(1갈론은 4,546리터)의 물에 5리브르(1리브르는 500그램)의 보릿가루, 향료와 풀, 그리고 마치 모르타르 반죽같이 찧은 청어 4마리와 뼈 등을 넣고 오랫동안 푹 익혀 만들었기 때문이다. 1차 세계대전 때의 독일과 오스트리아 군대의 보통식사이기도 한 이 음식은 곡사포의 맛없는 스튜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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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자기소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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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21 Oct 2007 23:00:51 +0900</pubDate>
		<author>삭풍</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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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닉은 삭풍.초기에는 카드놀이라는 닉을 즐겨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고 1때 친구의 소개로 단촐한 ad&amp;d파티의 마법사를 맡으면서 rpg생활을 시작했습니다.그러나 해당 캠페인 자체는 오래 못갔고[...] 따지고 보면 벌써 5년차군요<br /><br />친구가 보내준 다쳇프로그램의 소스를 추적(?)해서 다쳇 커뮤니티에서 알피지 생활을 계속해 나갔고, 얀님이라는 분과 함께 여러 캠페인을 함께 플레이하면서 겁스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그후론 대개 겁스에만 주력한거 같군요.<br />경험해본 룰로는 wod,m&amp;m,d&amp;d클래식,Ad&amp;D,D&amp;D3.5 및 기타 여러 인디룰(안방극장등)이 있습니다.<br /><br />마스터링엔 뼈저리게 재능이 없어서 플레이에만 매진하고 있습니다.<br />RPG넷카마라는 모함도 있지만 사실이 아닙..[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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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자기소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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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21 Oct 2007 22:43:34 +0900</pubDate>
		<author>삭풍</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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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blockquote ><cite >작성자: Xenosia</cite>제노시아, 줄여서 제노, 간혹[..] 헬마로도 불립니다.</blockquote>항상이겠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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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자기소개!</title>
		<link>http://lokasenna.pe.kr/forum/comments.php?DiscussionID=2&amp;Focus=33#Comment_33</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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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21 Oct 2007 22:19:31 +0900</pubDate>
		<author>orches</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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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안녕하세요, 저는 orches 라는 닉네임을 사용하고 있는 20대 초반의 여성입니다. 오로치라고 불린 적도 있었고.. 제일 많이 불리는 건 역시 오체스. 간혹 오케스라고 불립니다. 편하실 대로 부르십시오.  <br /><br />2005년 5월 말, 다챗에 가입하고 한강호님의 유토피아 프로젝트 캠페인에 참여하게 되면서 오알인생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역천이었던가요.. 어떤 캠페인을 뛰시는 듯한 분이셨는데.. 그분께 무턱대고 플레이 팀에 들어가려고 하지 말고 다챗에 있는 리플레이 꼼꼼하게 읽고 난 뒤 천천히 들이대라는 쪽지를 받았었습니다) 뛰기는 꽤 뛴 것 같은데 완결을 본 캠페인은 거의 없습니다. 완결되는 캠페인을 보는 것이 나름 소망입니다!<br /><br />플레이어로써의 저는 미숙한 점이 많고 노력해야 할 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접해본 룰도 적고.. 이제 막 걷는 병아리같은 느낌을 받고 합니다. 다른 분을 만나고 같이 꺄아하면서 즐기고,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에.. 오알을 하는 의의를 두고 있습니다. 전투는 좋아하는 편은 아니며 어쩔 때는 거북하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동시에 필요하다면 해야한다고 생각하지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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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자기소개!</title>
		<link>http://lokasenna.pe.kr/forum/comments.php?DiscussionID=2&amp;Focus=32#Comment_32</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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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21 Oct 2007 21:31:17 +0900</pubDate>
		<author>로키</author>
		<description>
			<![CDATA[ <blockquote ><cite >작성자: Xenosia</cite>제노시아, 줄여서 제노, 간혹[..] 헬마로도 불립니다.</blockquote><br />간혹이 아니라 종종이겠죠? (..) 반갑습니다~ 아키시엘님도 블로그 쓰신 것만 한두 번 봤는데 여기서 뵈니 반갑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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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마스터링: 준비와 진행, 관리</title>
		<link>http://lokasenna.pe.kr/forum/comments.php?DiscussionID=8&amp;Focus=31#Comment_31</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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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21 Oct 2007 21:12:32 +0900</pubDate>
		<author>로키</author>
		<description>
			<![CDATA[ 2. 진행 (길어져서 나눠 올립니다)<br /><br />플레이 들어가면 시작 상황을 내놓고 참가자들이 어떻게 반응하나 봅니다. 참가자들이 반응하면 거기에 따라서 다시 변화가 생기고, 저는 그 변화를 인물의 반응이든 물리적 반응이든 표현합니다. 그렇게 연쇄반응이 일어나면서 플레이가 굴러갑니다. 그러다가 참가자가 어떻게 할지 몰라서 플레이가 정체되고 그 반응의 연쇄가 끊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면 다시 참가자 배경에 있는 NPC 중 노는 애들(...)이 있나, 참가자 하나 이상이 좋아할만한 극적 상황이 있나, 아니면 그냥 반응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있나 ("갑자기 닌자들이 뛰어듭니다!" "문을 열자 백작의 시체가 품안에 쓰러집니다!") 생각해서 다시 상황을 내놓고 연쇄반응을 일으킵니다. <br /><br />이상적으로는 이렇게 해서 매끄럽게 나갑니다만, 어떤 때는 영 잘 안 풀릴 때가 있습니다. 극적 상황을 생각하고 배경 세계의 공백을 채우는 준비가 부족했는데 즉흥으로 만들어내는 것도 잘 안 되거나, 아니면 연쇄반응이 일어나긴 나는데 영 산만하고 재미가 없다거나. 그럴 때면 참가자들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뭔가 잘 안 되고 있는데 좋은 생각 없느냐고 말이죠. 이런 때 억지로 계속하면 꼭 후회할 일이 나서.. 물론 저는 재미없는데 참가자는 괜찮은 때도 있고, 저는 재미있는데 참가자는 지루한 때도 있으니까 이런 데서 의사소통의 중요성이 나오는 거겠죠. <br /><br />3. 관리<br /><br />세션이 끝나면 되도록 플레이에 대해 얘기해보고, 특히 플레이중 문제가 된 것이 있으면 꼭 논의합니다. 다음 세션 시작하기 전에도 첫 세션과 마찬가지로 하지만, 지나간 플레이의 사건을 고려에 넣는다는 점이 다르겠죠. 앞뒤가 안 맞는 데가 있으면 생각해보거나 의논해보고요. 특히 주인공에 대해서는 가끔 중간점검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극적 진행은 서로 만족스러운지 등등. <br /><br />여러분의 마스터링 방식은 어떤가요? 참가자 입장에서 겪어본 진행 방식에서 좋았던 점, 나빴던 점 등도 함께 얘기해볼 수 있으면 좋을 것 같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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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마스터링: 준비와 진행, 관리</title>
		<link>http://lokasenna.pe.kr/forum/comments.php?DiscussionID=8&amp;Focus=30#Comment_30</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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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21 Oct 2007 21:11:54 +0900</pubDate>
		<author>로키</author>
		<description>
			<![CDATA[ 여러분은 캠페인과 세션 준비와 진행을 어떻게 하세요? 각자 다른 방식이 있을 텐데, 자기 방식을 생각해 보는 것과 남이 하는 방식을 보는 건 둘 다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식으로 합니다. <br /><br />1. 준비<br /><br />캠페인을 준비할 때면 우선 어떤 규칙과 배경을 할지 생각해서, 그리고 동시성 플레이라면 시간대를 정해서 모집하는 방법을 선호합니다. 처음부터 '이런 플레이를 이때 한다'는 기반을 정해두면 취향과 시간대가 맞는 사람을 구하기가 한결 쉬워지니까요. 물론 언제나 이런 식으로 시작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만, 본격적으로 돌리려면 경험상 제일 좋은 방법이긴 하더군요. 이 시점까지 캠페인 내용이나 배경의 자세한 사항은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분위기나 전형적인 진행 같은 건 막연하게 있을 수 있지만요. <br /><br />일단 사람이 모이면 주인공을 만듭니다. 보통 모두 함께 모여서 캐릭터를 만드는 세션을 하나 합니다. 이게 제가 보기에는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배경과 성격 등 주인공에 대한 사항, 특히 이 캐릭터를 통해 표현하려는 로망 파악에 중점을 둡니다. 인물의 동기와 성격, 주변 사람과의 관계 등에 대해 해석이 일치하는지, 이 부분은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은데 참가자 생각은 어떤지 등등 질문을 통해 인물 해석을 다듬고 조율합니다. 캠페인중 어떤 걸 보고 싶은지 하는 제안도 이때 많이 주고받을 수 있지요. <br /><br />다음, 캠페인 주요 인물과 시작 상황을 생각합니다. 주인공과 관련된 인물들을 끌어다가 이들의 목적,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을 생각해 이들이 어떤 상황을 만들지 생각해 봅니다. 주인공 주변 인물을 재해석하고 제 것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캠페인에 제 자신의 취향을 반영하고, 동시에 참가자들에게는 자신이 만든 설정에 새로운 해석과 의외성을 부여한다는 면에서 아주 즐거운 과정이죠. 또한, 주인공들의 과거와 목적, 극적 지향 등을 생각해 어떤 상황에 빠지면 재밌을까 궁리하면서 그 상황을 창출할 수 있는 인물들도 설정합니다. 그런 극적 상황에 등장할 만한 배경의 세부사항이 있으면 설정해서 채웁니다. 이 과정에서 참가자들과 폭넓게 의견을 교환하려고 노력합니다. <br /><br />이상이 준비 과정입니다. 단편이나 단기 플레이에서도 거치는 과정이지만, 캠페인보다는 짧게 지나간다는 차이가 있겠죠. 주인공을 만드는 과정은 좀 몰아붙이면(..) 30분 내에도 할 수 있고, 많이 몰아붙이면 5분 10분도 됩니다. (다만 거의 제가 만드는 것에 가까워져서 선호하지는 않습니다.) 상황과 인물 설정은 빨리 하려고 하면 주인공 제작과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서, 단편이라면 주인공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면서 머릿속에 슥슥 스쳐가는 것 정도로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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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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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자기소개!</title>
		<link>http://lokasenna.pe.kr/forum/comments.php?DiscussionID=2&amp;Focus=28#Comment_28</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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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21 Oct 2007 13:48:47 +0900</pubDate>
		<author>Xenosia</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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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제노시아, 줄여서 제노, 간혹[..] 헬마로도 불립니다.<br /><br />승한님이나 로키님처럼 저도 중1때 클래식 셋트를 지르고 RPG를 시작했습니다.<br />그당시 학교 안에서 클래식 팀2팀 소드월드 1팀, 매직 더 개더링을 즐기는 인원이 20명 정도 였던<br />나름 괜찮은 환경이었죠. 3학년때는 아예 친구가 TRPG부를 건의한게 잘되서 클럽 활동으로 했었으니.<br />[국어 선생님이 밀어주셨..[..] <br /><br />고2쯤부터 한동안 RPG를 중단했다가 군제대 이후 우연찮게 다챗을 알게 됬는데<br />그때 부터 OR을 시작하게 됐습니다.<br /><br />플레이 해본 시스템은 D&D 클래식, D&D 3.5, 겁스국문 2판, 로키님과 함께한 안방극장 대모험 정도군요.<br />어느정도 알지만 못해본 시스템으로 소드월드, 크리스타니아, 구WoD의 메이지, 뱀파이어, 세븐스 씨가 있고<br />해보고 싶지만 못해본 시스템은 M&M, 세기의 혼과 미딕입니다.<br /><br />개인적으로 캠페인 설정의 역사나 지리, 음모론 쪽 작성을 좋아하고<br />RPG와 연관성이 적은 부분의 자동화에 관심이 많으며<br />그런 이유로 <s >오래전에 때려치웠던</s>오알툴의 제작에 다시 착수한 상태입니다.<br /><br />현재는 진행하던 겁스 캠페인인 언더월드를 중단한 상태로 3.5 캠페인 검은 성모단에 플레이어로 참가하고 있습니다.<br /><br /><br />로키/ 일찍 쓸랬는데 창원<s >유배</s>출장갔다온다고 못썼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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